컨텐츠 바로가기

11.27 (수)

이슈 강제징용 피해자와 소송

강제징용 피해 14만명… 소송 중인 962명도 줄줄이 승소 가능성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강제징용 배상 확정]

강제징용 줄소송 이어지나

이번 판결과 별도로 전국 법원에서 진행 중인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14건이다.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962명이 신일철주금·미쓰비시중공업·히타치조센·스미토모석탄광업 등 87곳의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들 소송에 대한 판결도 30일에 선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1938년 이후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중노동에 시달린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승소 판결 후… 94세 강제징용 피해자의 눈물 -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오른쪽)씨가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대법원 승소 판결에 대한 소감을 밝히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왼쪽은 이씨와 함께 소송을 제기한 고(故) 김규수씨의 아내 최정호씨다. 이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혼자 남아 판결을 듣게 돼서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법원은 이날 판결에서 '일제강점기 때 벌어진 불법행위에 대한 재판 관할권이 국내 법원에 있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그러면서 '식민지 지배를 합법으로 보는 일본 법원이 동일한 소송에 대해 내린 판결은 효력이 없다'고 했다. 일본 법원이 과거에 내린 패소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주진열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내 법원이 일제강점기 시절 벌어진 모든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시작할 수 있다는 선언"이라고 했다.

'강제징용' 문제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 14만명으로 추정된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가 실태 조사를 통해 파악한 징용 피해자는 14만8961명이다. 이 중 생존자는 5000여 명 선이지만 손해배상 소송은 본인뿐 아니라 유가족도 제기할 수 있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동원된 한반도 노동자를 사용한 일본 기업은 299개다. 일제 당시 3대 재벌로 알려진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계열 기업과 닛산 등 자동차 업체, 화장품 업체 가네보, 맥주 회사 기린, 가전제품 업체 파나소닉 등도 포함됐다. 한국에 사업체를 가진 기업도 많다. 국세청에 따르면 국내에 들어온 일본 법인은 395개로 미국(420개) 다음으로 많다. 총투자액은 891억엔(약 9000억원)이다. 강제징용과 관련된 299개 법인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회사들이 다수 포함돼 있어 대법원 판결로 인한 동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과 같은 민사소송은 원고의 일방적인 제소로 소송이 시작된다.

피해자들은 손해배상을 받을 권리를 확보했지만 실제 배상까지는 갈 길이 멀다. 신일철주금이 자발적으로 내놓지 않는 한 법원을 통해 신일철주금 자산을 압류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 내 자산 압류는 불가능하다. 과거 일본 법원이 "신일철주금은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내에 있는 재산이 압류 대상이다. 신일철주금은 포스코 주식 지분 3.32%(289만4603주)를 보유하고 있다. 30일 기준으로 7550억원 정도다. 하지만 미국 은행을 낀 미국주식예탁증권(ADR) 형태로 가지고 있어 재산 압류에는 미국 법정의 승인이 필요하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석광현 교수는 "미국 법정이 '책임 있다'고 한 한국 판결과 '책임 없다'는 일본 판결 중 어느 것을 받아들일지에 달린 문제"라고 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강제 집행 등 극단적 조치에 나서는 건 역사적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라며 "정부도 정치적 합의를 통해 문제를 풀어 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대법원은 손해배상 청구권의 시효(최장 10년)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피해자들은 그동안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이장희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얼마든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배상 책임 문제를 다퉈 볼 수 있다는 취지"라고 했다. 시효를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배상 소송이 '강제징용'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수난을 당한 피해자(후손)도, 1938년 총동원법에 의해 강제로 징병당한 피해자(후손)도, 2차 대전 당시 수탈당한 미곡과 물자를 빼앗긴 자본가(후손)와 농민(후손)도 피해를 증명할 수 있다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다만 이 소송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해야 한다. 국제법상 "외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은 타국 법원이 담당할 수 없다"는 '주권 면제' 원칙 때문에 승소하더라도 실제 배상을 받는 건 쉽지 않을 전망이다.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선 주권 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일부 주장도 있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주장은 아니다.

따라서 극단으로 치닫기 이전에 정치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독일 정부는 2000년 폴란드·체코의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기 위해 자국 기업들과 함께 8조원을 출연해 재단을 만든 사례가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엄보운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