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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나를 위한 한 해 마무리, 지난 2018년 달력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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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인터뷰

미술치료사 정은혜

2018년도 이제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올 한 해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한겨레

조용히 앉는다. 시끌벅적한 송년회, 자꾸 울려대는 휴대전화 성탄·송년 메시지는 잠시 잊어도 좋다. 한 장 남은 달력, 이제 넘기면 2019년이다. 나만을 위한 한 해 마무리를 하고 싶은 이들에게 미술치료사 정은혜(46)씨는 ‘지난 달력 만들기’를 추천한다. 2018년 열두 달을 돌아보며 매월 핵심 키워드를 뽑아 지나간 달력을 그려보는 작업이라 한다.

지난 14일 정은혜씨를 만나 작업에 대해 물었다. 제주에 사는 그는 서울 은평구 샨티출판사에서 15일 열리는 ‘지난 달력 만들기’ 워크숍 진행을 위해 서울에 온 참이었다. “어떻게 만들면 되는 건가, 이런 작업이 정말 효과가 있나?” 의심 가득한 질문에 그가 답했다. “내가 해보고 좋아서 권하고 있다. 해보면 알 것이다.” 그는 이것이 특히 ‘불행하지는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위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지난 달력 만들기’는 무엇인가?

“내가 직접 만들어 본 뒤 좋아서 시작한 치유 프로그램이다. 2015년 첫 책 <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를 썼다. 미국에서 미술치료를 전공하고 정신병원 등에서 일하며 겪은 일을 녹여낸, 오래 공들인 책이었다. 그런데 그해 나를 가장 지지해주시던 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너무 힘들어서 다시 미술치료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한 해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달력을 만들다보니 아버지가 내 책을 보고 좋아하던 날도 기억 나고 내겐 너무 중요한 해였음이, 그 흐름이 느껴졌다. 내가 고민하는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업이 내게 너무 도움이 돼서 이후 워크숍 프로그램으로 만들게 됐다.”

올해 달력 한장한장 넘겨보며
그 달의 사건과 감정 그려보기
불행하진 않지만 행복하지 않은
현대인을 위한 미술 치유 작업

작업 준비물은 간단하다. 우선 종이 10여장과 내가 좋아하는 그림 도구가 필요하다. 맨질맨질한 에이포(A4) 용지도, 보슬보슬한 느낌의 스케치북도 좋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필, 날렵한 샤프 펜슬이나 펜, 두툼한 색연필, 꾸덕꾸덕한 크레파스, 투명한 수채물감, 무엇이든 고르면 된다. 그 재료들 옆에 내가 쓰던 달력이나 한 해 일정을 기록해온 다이어리를 놓으면 도구 준비는 끝.

―어떻게 시작하면 되나.

“내가 워크숍을 진행할 때는 사람들에게 올 한 해가 어땠는지, 후회되는 것이 있는지 등 대화를 나누면서 몰입도를 높여간다. 낯선 이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질문을 하는 순간, ‘내 상황을 어떻게 알고 하필 이 질문이 내게 왔지’라며 운명적으로 울컥 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 혼자서 작업할 때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면 자신의 지난 한 해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겨레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면 좋을까.

“작업을 돕기 위해 ‘2018년을 돌아보는 질문지’라는 것을 만들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보자.

‘올해 무엇을 배웠습니까? 무엇을 미루었습니까? 언제 가장 살아있다고 느꼈나요? 누구를 용서해야 하나요? 당신의 삶이나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나요? 설레임이 남았나요? 당신이 올해 한 일 중 가장 자랑스러웠던 일은? 어떤 부분에서 가장 막혔었나요? 올해 처음으로 해 본 것이 있나요? 새해 계획을 이루셨나요? 올해에 평생 기억하고 싶은 날이 있었나요? 올해 어디에 돈을 가장 많이 썼나요? 올해 덜 했다면 좋았겠다 싶은 것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올해 더욱 가까워진 사람이 있나요? 새로 깊게 알게 된 사람이 있나요? 올해 가장 많이 쓰인 당신의 장점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짜증나는 일이 있었나요? 무엇을 시도하고 실패했나요? 올해 어떤 걱정이 있었나요? 올해 있었던 일 중 한 가지를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시겠습니까? 작년에는 힘든 일이었는데, 올해는 쉬워졌거나 저절로 해결이 된 일이 있습니까?’”

―그림은 어떻게 그려야 하나.

“내가 잘 산 건지 못 산 건지 판단을 내리려 하지 말고 ‘좋게 그려야지’ 하는 마음도 버리고 그리면 된다. 올해 쓰던 다이어리나 휴대전화 메모를 살펴보며 그 달에 있었던 일을 정리해본다. 3월에 무슨 일이 있었다면, 누군가를 만났거나 헤어졌거나 시험을 봤거나 했다면, 그 일을 떠올렸을 때의 마음을 그려보는 거다. 좋다 싫다가 아니라 그때 떠오르는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림을 그리면 당시의 감정이 떠오르고, 복잡했던 상황과 마음이 결국 한 컷의 그림으로 완성 된다. 우리 안의 여러 기억, 감정 이런 것들이 뒤섞여 묻어나온다. 그렇게 열두 달치 그림을 다 그려서 종이를 쭉 펼쳐놓으면 한 해의 그림이 한 눈에 보인다. 그리고 그 속의 흐름이 보인다. 별개로 떨어져 있던 사건들이 한 눈에 연결되면서 아, 이런 의미가 있구나 싶어진다.”

―1월부터 12월까지만 그리는 건가.

“아니다. 이 작업은 내년(2019년) 1월까지 ‘13장의 달력’을 그리는 것이다. 2018년 열두 달치의 그림을 쭉 펼쳐놓고 보다보면 흐름이 보인다. 올해 어떻게 살았구나를 알게 되면 내년을 어떻게 살 수 있을지 그 흐름도 알게 된다. 나라는 사람이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지 알게 된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정말 보고 싶고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사람. 그 사람이 올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보는 그런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해보자. 그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인 거다. 그 사람이 어떤 흐름, 어떤 궤적으로 살고 있는지, 그리하여 다음 해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알아보는 작업이다.”

한겨레

―올해 주요 사건을 글로 정리하는 것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뭐가 다른가.

“그림은 말보다 훨씬 가슴에 가까운 언어다. 요즘 ‘2018년 폭망했다’ 이렇게 직접적인 표현을 많이 쓰는데 그림을 그리며 차근히 하나하나 따져보는 거다. 정말 그런지. 그림으로 그리다보면 망한 것도 단계와 흐름이 있다. 언어로 말했을 때는 위·아래, 좋다·싫다 이런 식의 이분법적 표현이 되는 것도 그림으로 그리면 그 일이 일어났을 때의 느낌, 온도 등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온 한 해의 흐름 파악하면
내년 1월 달력 그림도 그려져
내가 내 삶 어찌 만들고 있는지
13장 달력 그림으로 보는 시간

정은혜씨는 한국에서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던 30대 중반, 미국으로 유학을 가 미술치료를 전공했다. 미국 시카고의 정신병원과 청소년치료센터에서 일했고 한국에 돌아와 2015년 첫 책 <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를, 2017년에 <변화를 위한 그림 일기>과 그림 일기장 <나에게 잘하자>를 출간했다. 책 곳곳에는 치유를 위한 그림 그리기 제안이 들어있다.

―책에서 제안한 치유 프로그램 중 ‘소통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공감 대화’가 있더라.

“단순한데 참 묘한 감동을 주는 작업이다. 두 사람이 종이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주거니 받거니하면서 함께 그림을 그리는 단순한 작업이다. 두 사람 사이에 큰 종이를 놓고 각각 마음에 드는 색연필 하나씩을 선택한다. 내가 뭔가를 그리면 상대가 그리고, 그 다음 다시 내가 그리는 식이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그 작품 안에서 고유의 리듬을 지닌 대화가 열린다. 남이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내가 그린 원에 상대방이 칠을 해준 것만으로 지지를 받았다고 느끼거나 상대방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찰흙으로 하는 ‘두려움을 직시하는 최악의 시나리오 만들기’도 인상적이었다.

“불안을 이기기 위해 걱정을 증폭시켜보는 작업이다. 서로 믿고 지지하는 몇 명이 모여 걱정거리를 나눈다. 위로의 말 대신 걱정을 키우는 질문을 던지며 최악의 상황을 만든 뒤 서로의 걱정들을 모아 장면을 꾸며본다. 색찰흙으로 인물, 소품, 배경 등을 만들어 움직여보면서 필요한 것은 더 만들어 넣고 불필요한 것은 빼내 최악의 상황을 함께 헤쳐나가본다. 이 작업을 해보면 놀라운 것이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손에 꼽힐 정도로 몇 가지 주제의 변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의 중심에 다다르면 우리는 서로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서로가 연민의 마음으로 연결되는 찡함을 느낄 때,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

―미술치료에는 재료도 중요하다는 느낌이 든다.

“재료들이 갖고 있는 물성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 마음을 많이 움직인다. 가장 큰 부분은 ’통제’다. 꼼꼼하고 정리를 잘하는, 통제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날카로운 펜과 같이 드라이한 도구를 좋아한다. 물기가 많은 수채화는 통제하기 어렵고 찰흙도 그렇다. 내 삶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통제 안 되는 재료를 주는 것은 ‘힘든 거 해봐라, 통과해봐라’는 의미가 있다. ‘나는 이래야만 해’라는 걸 넓혀보라는 의미도 있다. 색연필은 통제하기 좋은 재료다. 연약하니까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색연필 드로잉북이 잘 팔린다. 자유롭게 그리는 게 아니라 예쁜 그림, 아무의 심기도 건드리지 않고 불편하게 하지 않는 그림을 선호하는 시대다. 인기 있는 책들의 표지나 제목을 봐도 그런 이미지가 많다.”

한겨레

―미술관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미술치료를 전공한 계기가 있나.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를 돕는 게 너무 좋았다. 어린시절 굉장히 내성적어서 친구랑 놀기보다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그런데 누군가를 도울 일이 있을 때 용기가 나고 그 기쁨이 오래 남더라. 남을 돕는 일이 내게 얼마나 용기를 주는지 경험을 통해서 알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다.”

외롭고 우울할 땐 그림을

―미국과 한국에서 미술치료로 아이들을 만난 경험이 있다. 차이가 있던가.

“미국과 한국에서 만난 아이들의 문제 양상이 달랐다. 미국 시카고의 청소년 거주치료센터에서 만난 8~18살 아이들은 한국 아이들보다 폭력성이 굉장히 높았다. 치료 중에도 갑자기 가위를 들고 서로 죽이려고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폭력에 많이 노출이 된 아이들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표현을 할 때는 매우 자유로웠다. 그림을 그리다 춤을 추기도 하고 ‘마음대로 작업해보라’고 하면 자유롭게 작업을 했다.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 ‘마음대로 해봐’ 하면 아무도 안 움직인다. ‘무슨 색으로 무슨 재료로 뭘 해요?’ 물어본다. 가이드(안내)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고 분노, 슬픔 등 감정이 눌려 있는 상태가 많았다. 부모는 아이들의 문제 행동을 고쳐달라고 데려왔지만 꼬리를 타고 올라가다보면 부모의 문제가 있었다.”

―힘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불행하지는 않은데 행복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으로 책을 쓰고 치유 프로그램을 만든다. 우린 모두 아프고 우린 모두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누구나 인정하는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아프고 외롭고 우울할 때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남의 그림을 따라하는 것 말고 자기 그림을 그리면서, 어두운 터널이 사라지고 바닥을 치고 올라오고 슬픔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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