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29일 유럽연합 탈퇴 시한
아직도 절차·과도기 방안 확정 못해
“엉망진창 상황” “정치인들 미쳤다”
준비 없는 브렉시트 가면 대침체 우려
혼란 근본원인은 영국사회 분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불평등 심화
저소득·노동자 계층 가장 큰 타격
“상실감과 분노가 브렉시트로 폭발”
좌우 거대 양당인 노동당·보수당
명문대·고소득·런던 출신이 이끌어
수십년 누적된 불만 담아내지 못해
“저소득계층 노동당한테도 잊혀”
여느 유럽 나라들처럼 영국에서 12월은 크리스마스의 계절이다. 도시의 주요 거리에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등장하고 상점마다 캐럴이 흘러나온다. 동네마다 있는 펍들도 저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치장하고, 여기저기서 크리스마스마켓이 열린다. 서양 최대의 명절인 크리스마스의 아늑하면서도 즐거운 분위기에 젖어드는 시기다. 하지만 올해 영국의 12월은 사뭇 다르다. 크리스마스 장식은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지만, 영국 사람들의 마음은 그 분위기만 즐기고 있을 여유가 없다. 티브이에서는 연일 ‘브레이킹 뉴스’(breaking news·긴급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어제 상황과 오늘이 다르다. 내일도 예측할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다는 거야”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회오리 때문이다.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40대 주부 레이치 로스는 “완전히 엉망진창(mess)이다. 우리는 브렉시트라는 토끼굴(rabbit-hole)에 빠져버렸다”고 말했다. 토끼굴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주인공 앨리스가 토끼굴에 떨어진 뒤 온갖 이상한 일들을 겪는 것에서 유래한 말로, 혼란스럽고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상황을 말한다. 50대 영어강사인 새뮤얼 무어(가명)도 “아무도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브렉시트에 동조하는 그는 “브렉시트에 대한 공포는 과장돼 있다”며 “영국 정치인들이 미쳤다고 생각하지만 브뤼셀(유럽연합의 수도)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브렉시트를 하기로 한 시한이 내년 3월29일이다. 불과 석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영국은 어떤 절차와 과정, 과도기를 거쳐 유럽연합(EU)에서 빠져나올지 그 방법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의회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영국 정치권은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만약 아무런 준비 없이 브렉시트가 닥칠 경우(일명 ‘노딜 브렉시트’) 영국이 겪어야 할 충격과 혼란은 심각한 수준일 것이다. 그 충격은 당연히 영국을 넘어 유럽연합 전체에, 또 세계 경제에 미칠 가능성이 크다.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가 영국의 브렉시트 혼란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없는 이유다. 영국은 어쩌다 ‘토끼굴’에 빠지게 됐을까.
롤러코스터 탄 정국, 갈수록 꼬이는 상황
현재 영국의 혼란은 테리사 메이 총리(보수당)가 유럽연합과 2년 가까이 이어온 협상 끝에 가져온 탈퇴방식에 대한 합의안이 의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메이 총리가 합의안 초안을 가져온 것이 11월11일이었다. 장시간 토론이 벌어졌으나 이날 내각은 합의안을 승인했다.
하지만 하루 뒤 이른 아침부터 영국 언론들은 도미닉 라브 브렉시트부 장관 사임 소식을 알렸다. 이날 오전 9시 공영방송인 <비비시>(BBC)는 1시간짜리 긴급방송을 편성해 주요 정치인들과 정치 전문가의 연속 인터뷰를 하며 라브 장관 사퇴 파장을 짚었다. 라브 장관은 법무부 장관과 주택부 장관도 지낸 메이 정부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메이 총리는 유럽연합의 ‘괴롭힘’(bullying)에 굴복했다”고 주장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문에 대통령이 서명하고 난 다음날 통상교섭본부장이 ‘소신과 다르다’며 사표를 던진 모양새다. 정국은 들끓었다. 짧은 잠복기를 거쳐 지난 5일 ‘브레이킹 뉴스’가 다시 나왔다. 하원(영국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이 메이 정부를 상대로 사상 처음으로 ‘의회 모독죄’를 적용해 311 대 293으로 가결시켰다는 보도였다. 정부가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데이비드 고크 법무장관)며 합의안의 법률검토 보고서 전문을 하원에 제출하지 않은 게 빌미가 됐다.
이때부터 영국 언론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은 메이 본인도 알 수 없게 됐다”(<가디언>)는 취지의 보도를 내놓으며 수많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10일 밤 이런 시나리오에도 없던 일이 일어났다. 브렉시트 정국의 분수령이 될 합의안에 대한 하원 표결(11일)을 놓고 메이 총리가 하루 전 늦은 밤에 전격 연기 결정을 내린 것이다. 부결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틀 뒤인 12일에는 보수당 강경파가 주도해 총리 불신임 투표를 진행했다. 가까스로 부결되긴 했지만 메이 총리는 ‘식물 총리’가 됐다. 이제 영국 주요 매체 기사엔 ‘노딜(No Deal) 브렉시트’(유럽연합과 무역이나 국경문제 등에 관해 아무런 합의를 하지 못한 채 탈퇴하는 것)란 표현이 빠짐없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메이의 합의안이 하원을 통과하지 못하면 일정상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
메이 총리는 13일 유럽연합 본부가 있는 브뤼셀로 날아갔다. 하원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합의안을 조정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유럽연합 지도부는 “재협상은 없다”고 못박았다. 15일치 <가디언> 1면 머리에는 ‘메이, 모욕만 받고 빈손으로 돌아오다’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교착 상태가 길어지자 주요 언론이나 정치 전문가들 사이에선 “2차 국민투표(재투표)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1997~2007·노동당)는 언론 인터뷰에서 “2차 국민투표가 현재의 난국을 끝낼 수 있는 가장 민주적인 방식”이라고 말했다. 의외로 메이는 강경했다. 그는 “(2016년 투표에서 확인된) 국민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며 2차 투표 주장에 맞섰다.
17일 메이 총리는 1월 셋째 주(14~20일)에 합의안을 하원 표결에 부치겠다고 발표했다. 제1야당인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는 “메이 총리가 영국을 국가적 위기로 몰고 있다”고 비판하며 메이 총리에 대한 불신임 표결을 요구했다. 하원 표결에서 브렉시트 시한까지 너무 촉박해 다른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막아버리는 꼼수라는 것이다. <비비시>는 영국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 말을 인용해 “2차 국민투표를 위해선 최소한 10주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국민투표 준비기간이 짧으면 국민투표 자체가 적법성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2차 국민투표로 갈지, 메이의 합의안이 통과돼 실현될지, 노딜 브렉시트로 갈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혼란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급기야 메이 총리가 브렉시트를 101일 앞둔 지난 18일 노딜 브렉시트에 대비한 ‘컨틴전시 플랜’(비상대책)을 점검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국경에 3500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20억파운드(약 2조8500억원)의 긴급자금을 준비하겠다는 내용이다.
너무 간단했던 국민투표, 예고된 혼란
현재 영국 정치권이 사분오열하고 있는 직접적인 원인은 이른바 ‘백스톱’(Backstop·안전장치) 문제다. 아일랜드섬은 아일랜드와 영국 연방 북아일랜드가 마주하고 있다. 현재는 영국과 아일랜드 모두 유럽연합 회원국인 터라 통관 절차 없이 상품과 서비스는 물론 사람도 자유롭게 오간다. 출입국 관리소도 없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엔 국경이 살아나게 된다. 아일랜드는 유럽연합에 남고 (영국령인) 북아일랜드는 떠나기 때문이다. 백스톱은 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섬에 나타날 혼란을 막기 위해,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국경통제를 하지 않고 북아일랜드는 유럽연합 관세동맹 안에 남기기로 한 조항이다. 이 백스톱에 대해 노동당은 물론 보수당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영국 통합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현재의 난국은 예고된 혼란에 가깝다.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 문구는 너무 간단했다. “당신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찬성하는가?” 총론만 있고 각론은 묻지 않았다. 탈퇴 방식에 대한 공감대가 없는 상황에서 유럽연합과의 협상에 나서야 했던 영국 정부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브렉시트 뒤에도 ‘유럽 단일시장’에는 남는다는 게 기본 노선이었다. 유럽연합이 경제공동체이며 동시에 정치결사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런 구상은 ‘반쪽 탈퇴’에 가깝다. 완전한 탈퇴를 주장하는 브렉시트 강경파(도미닉 라브 전 장관 등 보수당 일부 세력)나 유럽연합 잔류를 지지한 노동당과 스코틀랜드국민당(SNP), 이 양쪽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합의안은 애초에 존재하기 어려웠던 셈이다. 메이 총리의 합의안은 브렉시트(2019년 3월29일) 이후 2020년 말까지 21개월간의 전환기간을 두고, 이 기간 동안 유럽연합과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것으로 돼 있다. 백스톱 문제가 해소되고 하원 승인도 받더라도 전환기간 중 자유무역협정 협상 과정에서 갈등의 불씨가 되살아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혼란의 배경 중 하나로 262석을 쥐고 있는 제1야당 노동당도 빼놓기 어렵다. 노동당은 국민투표 이후 2년여간 브렉시트에 대해 줄곧 ‘회색 지대’에 머물러왔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9월 “노동당의 브렉시트 입장은 수수께끼와 같다”고 표현했다. 이는 노동당 안에서도 의견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노동당의 두 거물인 코빈 대표(2015년~현재)와 전 대표이자 총리를 지낸 토니 블레어의 생각이 크게 다르다. 블레어는 매우 강경한 유럽연합 잔류파다. 외곽단체 ‘토니 블레어 재단’을 만들어 유럽연합 잔류파한테 이론과 근거를 제공해왔다. 코빈 대표는 국민투표 당시 당론인 ‘유럽연합 잔류’에 대해 지지연설을 하길 꺼렸다. 당수에 오르기 전에는 좀 더 노골적으로 유럽 통합이 저소득층의 소득과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2월 브렉시트에 대한 노동당 공식 입장에 대해 코빈이 내놓은 발언은 이렇다. “유럽연합은 모든 문제의 뿌리가 아니다. 브렉시트는 모든 문제를 풀 수 없다. 동시에 유럽연합은 모든 번영의 원천도 아니다. 유럽연합을 떠난다고 해서 무조건 영국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수수께끼’라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위기의 뿌리, 조각난 사회
혼란의 원인을 좀 더 근본적으로 찾아들어가면 영국 사회에 깊게 팬 분열의 골이 드러난다. 30년 넘게 진행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결과로 심화된 경제적 불평등에, 유럽 통합에 따른 이민자의 급증으로 인한 문화적 갈등까지 겹쳐 있다. 브렉시트 통과 직후에는 “포퓰리즘 선동과 가짜뉴스에 속아 넘어간 선택”이라는 식의 분석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수십년 누적된 경제·사회·문화적 불만이 브렉시트로 표출됐다”는 분석이 늘어나고 있다.
1973년 영국은 유럽경제공동체(EEC·유럽연합의 전신)에 늦깎이로 가입했다. 이후 유럽 단일시장과 한 몸이 되는 과정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고착화됐다. 현재 영국은 선진국 가운데서도 가장 불평등한 나라들 중 하나다. 소득 불평등을 보여주는 지표인 지니계수(수치 1에 가까우면 더 불평등)를 보면 2016년 현재 영국은 0.35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5곳 중 6번째로 높다.
1980년대 본격화한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소득 분배가 급격히 나빠진 뒤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20년간 높은 수준에서 불평등이 유지되고 있다. 영국의 경제연구소인 레절루션재단(Resolution Foundation)에 따르면 2010년 현재 상위 10%가 총소득의 31%를, 하위 10%는 단 1%만 가져가고 있다. 유럽 통합 과정에서 무역 자유화와 자본의 이동이 확대(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되면서 제조업 몰락이 뒤따랐다. 반면 금융·법률 등 고소득 전문직 계층은 더욱 큰 소득을 얻으면서 불평등이 심화했다. 이런 업종에 진입하기 어려운 저학력 계층이나 맨체스터, 버밍엄 등 쇠락한 공업지역의 노동자 계층이 유럽 통합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1995년과 2015년 사이에 의류 산업에선 일자리가 20만개에서 7만개로, 가죽제품 제조업은 20만개에서 4만개로 급감했다. 기계장비 업종에서도 40만개에서 25만개로, 의료기기 산업에서도 15만개에서 3만개로 일자리가 줄었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뒤 나온 유권자 분석 결과는 이런 경제적 불평등과 브렉시트 찬반 입장이 긴밀히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비시>는 “학사 이상 학위 소지자가 가장 많은 30개 지역 중 29곳에서 유럽연합 잔류 지지가 높았고 그 반대인 30개 지역 중 28곳에서는 탈퇴를 지지했다. 브렉시트 투표엔 교육 격차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도(2016년 6월27일)했다. 국민투표 당시 당론과 달리 ‘탈퇴운동’(=Labour leave movement)에 나선 노동당 정치인 상당수는 맨체스터 등 과거 제조업이 융성했던 지역을 정치 기반으로 삼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현재도 브렉시트 지지 운동을 펼치고 있다.
문제는 브렉시트가 더 나은 경제를 가져오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특히 노딜 브렉시트는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 침체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달 말 영국은행(영국의 중앙은행)은 “노딜 브렉시트가 이뤄지면, 국내총생산(GDP)이 8%가량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국내총생산 감소 폭이었던 7%보다 더 크다. 주택가격은 30% 폭락하고 미국 달러 대비 파운드화 가치도 25% 떨어지며 현재 4% 수준인 실업률은 7.5%까지 치솟을 것으로 영국은행은 전망했다.
대규모 이민자 유입은 영국의 사회 분열을 설명하는 또 다른 근거로 꼽힌다. 최근 10여년 사이 이민 증가세가 가팔랐다. 1990년대 연간 이민자 수는 40만명 수준(12개월 이상 체류자 기준)이었으나 2000년대 초반 50만명을 돌파했고 2000년대 중반 무렵에는 60만명에 근접했다. 10년 주기로 작성되는 인구통계를 보면, 2011년 현재 영국 인구 중 외국 태생 비중은 12.7%로 10년 전(2001년) 8.3%, 20년 전(1991년) 6.7%에 견줘 크게 높아졌다. 1960년대와 70년대는 이 비중이 평균 6%를 넘지 않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최저임금 수준의 일자리에 종사한다. 이는 영국 내 하위 계층의 임금상승 억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민자들은 문화적으로도 이질적이어서 사회적 갈등도 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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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간 이주 문제에 천착해온 전직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 데이비드 굿하트는 지난해 말 출간한 저서 <어딘가로 가는 길>(The Road to Somewhere)에서 “2000년대 나타난 거대한 이주의 물결은 저소득층의 일자리와 소득만 가져가지 않았다. 전통은 해체됐고 공동체는 쇠락했다”며 “변화에 취약한, 소득이 적고 교육 수준이 낮은 계층은 상실감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2015년 코빈이 당대표에 오르기 전까지 노동당 당원 수가 크게 줄어든 것도 저소득 노동계층의 이런 불만을 노동당이 제대로 대변하기는커녕 보수당과 다를 바 없이 이민 확대 등 유럽 통합 정책을 옹호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노동당 당원 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본격화되기 직전이던 1980년 초만 해도 60만명을 웃돌았으나 친노동 성향의 코빈이 당대표에 오르기 전인 2010년엔 20만명 수준으로 감소했다.(코빈 재임기간 중 당원 수는 다시 50만명 수준으로 증가했다.)
대의민주주의의 실패
브렉시트 국민투표 전에 잠복해 있던 불만은 극우정당인 영국독립당(UKIP)의 부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좌우의 주류 정당인 노동당과 보수당에서 소외된 계층이 몰린 것이다. 2015년 총선거에서 영국독립당은 12.6%(정당 득표 기준)를 득표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유럽연합 탈퇴와 이민 제한을 핵심 정책으로 내세우는 이 정당은 1993년 창당된 뒤 90년대 내내 1%도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직전 총선인 2010년에도 정당득표율이 3.1%에 불과한 소수정당이었다. 이 정당이 몸집을 불리던 기간은 영국에 이민이 급증하고 노동당의 당원 수가 급감하던 시기와 상당히 겹친다.
굿하트는 “코빈 등장 이전까지 저소득-저학력 노동 계층은 주류 정당한텐 오랜 기간 ‘잊힌 존재’였다. 2000년대 포퓰리즘 부상이나 브렉시트와 같은 백래시(Backlash·반발)는 예고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보수당과 노동당은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 등 명문대를 나와 전문 업종에서 경력을 쌓은 런더너(뉴욕과 함께 가장 국제화된 도시로 꼽히는 런던의 거주자)들이 지난 20여년간 이끌어왔다”고 덧붙였다. 현재의 대혼란은 유럽 통합 과정에서 누적된 불만을 담아내지 못한 주류 정당의 ‘대의(代議)의 실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 사회는 영국과 많이 다를까. 부는 세습되고 있고, 소득 불평등은 고착화되고 있다. 만연한 ‘가짜뉴스’나 두터운 정치 불신은 한국 사회에도 분열의 뿌리가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 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보면 한국의 정치는 서울 유명 대학을 졸업(서울·연세·고려·성균관대 비중 49%, 20대 국회의원 기준)하고 공무원 및 공공기관(20.3%), 정당(16.3%), 법조(15.3%), 학계(15.0%), 언론(9.3%) 등 일부 업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다. 정치가 전체 국민의 뜻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표출되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한국 사회의 불평등 심화와 대의의 불균형이 이어질 경우 영국의 브렉시트 혼란이 한국에서 재현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런던/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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