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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단독] 정부, 공시지가 일방적 제시…감평사 "시장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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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감정평가사들이 공시가격 등을 입력하는 전산프로그램 화면. 국토교통부는 일반 토지표준지에도 `공시참고가격(붉은색 네모 부분)`을 제시했다가 삭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토교통부가 토지가격을 산정하는 과정에서 감정평가사들에게 가이드라인을 내려 공시가격을 좌지우지하려 했던 사실이 확인되면서 정부의 과도한 개입 논란은 커질 전망이다.

4일 매일경제가 다수 감정평가사와 업계를 취재한 결과, 국토교통부는 3.3㎡당 1억원이 넘는 고가 토지뿐 아니라 일반 토지에 대해서도 '공시참고가격'을 부여해 가격을 조정하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감정평가사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고가 토지에만 '중점관리토지'라는 이름을 붙여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기타 토지에 붙었던 공시참고가격은 슬그머니 빼버렸다는 것이 감정평가사들의 증언이다.

실제로 매일경제가 입수한 감정평가사들이 공시가격 등을 입력하는 전산 프로그램 캡처 화면에는 '공시참고가격'이라는 항목이 들어가 있었다가 현재는 사라졌다. 익명을 요구한 A감정평가사는 "공시참고가격은 정부가 '이 정도가 공시가격으로 적당하다'는 뜻인데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민간 전문가인 감정평가사들이 이를 따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국토부 산하 기관인 한국감정원에서 만든 가격일 것으로 추정할 뿐"이라면서 "거래 등 경제활동의 지표 역할을 하는 공시가격을 공정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다수의 감정평가사들이 가격을 매기는 것인데, 정부가 이런 식으로 강압적으로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토로했다.

한국감정원 관계자는 "문제가 된 참고 가격은 공시지가 산정에 도움이 되라고 자체적으로 추가한 것"이라며 "국토부의 지시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공기관인 감정원이 결국 정부의 관리를 받는 만큼 이번 일은 정부 입김이 작용했다는 게 업계의 시선이다.

그나마 감정평가사들 반발로 일반토지에 대한 공시참고가격은 사라졌지만, 3.3㎡당 1억원이 넘는 고가 토지는 정부 지침에 따라 최고 100%까지 공시가격이 오르면서 절차의 정당성 문제와 감정평가의 객관성 부문에 대한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을 전망이다.

국토부 부동산평가과는 지난해 12월 한국감정원에서 열린 지가공시협의회에 참석한 감정평가사들에게 "4~5년에 걸쳐 표준지 공시지가를 시세의 70% 수준으로 올릴 예정인데, 시세가 ㎡당 3000만원이 넘는 고가 토지는 한 번에 올리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참석자들이 "한꺼번에 시세의 70%까지 올리면 일부 지역 공시지가가 전년보다 3배까지 오른다"며 난색을 표하자 한발 물러서 지난해 대비 2배 정도(100%)까지 상승하도록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게 업계 전언이다.

논란이 일자 국토부는 4일 참고자료를 내고 "공시지가 감독·관리·공시 권한이 법적으로 국토부 장관에게 있기 때문에 '문제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부동산 가격공시에 관한 법률' 제3조에 따르면 '국토부 장관이 표준지 적정가격을 조사·평가하고, 중앙부동산가격공시위원회 심의를 거쳐 공시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이자 각종 세금과 부담금의 기준이 되는 자산가격에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내렸다는 사실은 업계에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정부가 직접 개입해 가이드라인까지 내린 것이 확인되면서 향후 개인 간 거래에서 이해관계가 엇갈릴 경우 감정평가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비판도 사그라들지 않을 전망이다.

감정평가업계는 정부의 '권한'은 인정하면서도 '행사 방식'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행 법령엔 정부는 표준지 공시지가를 조사·평가할 때 둘 이상의 감정평가업자에게 '의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감정평가가 끝난 후 중앙부동산가격공시심의위원회 등을 통해 '조정'해야 하는데도 미리 '구두 개입'한 것이 문제가 된다는 뜻이다.

정부의 '표준지공시지가 조사·평가요령'에 따르면 국토부 등이 중심이 된 지가공시협의회는 가격 산정 과정에서 특별부동산에 대해서 감정평가업자에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특별부동산'은 골프장 콘도 여객터미널 등 특수토지로, 이번에 문제가 된 '고가 토지'는 해당되지 않는다. 한 감정평가사는 "감정평가가 끝난 후에도 가격공시심의위원회 등 바로잡을 수 있는 '제도 장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국토부는 이에 대해 "고가 토지에 시세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많아 형평성을 제고해 달라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예시로 든 것이지 지침을 내린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감정평가사들에게는 정부의 '예시'가 곧 지침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 반론이다.

실제로 '문제'가 된 회의에 참석한 감정평가사는 "매년 공시지가 심사 과정에서 현실화율 등 정부의 가이드라인 제시가 관행적으로 이루어졌다"면서도 "올해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감정평가사도 "공시가격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를 국토부가 '중점관리토지' 이야기를 하면서 특정 토지를 집어내 올리라고 한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박인혜 기자 / 손동우 기자 / 정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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