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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토)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한번에 2명 자리 못 뜨고, 결근하면 임금 깎고… 고객 욕설 못잖은 회사 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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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한 노동에 신음하는 텔레마케터

하루 1인당 할당량 수백통 달해… 기본 콜수 못 채우면 쪽지로 닦달

이석 자제하라, 실적 신경 써라… 소변 4분, 대변 10분 문화 일상화
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텔레마케팅 업계의 눈물_신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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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바운더 텔레마케터를 포함해 모든 종류의 텔레마케터들은 감정노동이 불러오는 피로감 못지않게 불합리한 노동 관행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ㆍ물질적 피해를 호소한다. 감정노동이 보통 정신적 피해만 가져온다면, 불합리한 노동 관행은 여기에 더해 임금산정 방식 등에 영향을 끼쳐 생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텔레마케터들은 “업체 간 과도한 경쟁이 실적압박으로 이어지고, 실적압박이 불합리한 관행을 만들고 있다”라며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관행은 노동자로서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텔레마케터의 업무 방식과 기본적인 노사관계부터 알아야 한다.

텔레마케터들은 원청업체로부터 전화를 걸어 영업행위를 할 고객 명단 및 연락처가 담긴 데이터베이스(DB)를 받아 하루에 300~400통의 전화를 돌린다. 하지만 종종 이 수치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고객이 추가 정보를 요청하면 이를 설명해주는 일명 ‘후처리’ 과정이 발생하는데, 이 경우 한 고객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돼 평균보다 적게 전화를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후처리 과정 역시 영업의 연장선임에도 사측은 이를 잘 인정해주지 않는다. 카드 대출 영업을 하는 김모(45)씨는 “후처리 과정을 거쳐 영업실적이 쌓이면 다행인데, 고객 중에는 이것저것 묻기만 하고 실제 대출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허다하다”며 “사측은 이 같은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기본 전화통화 콜수(300~400콜)를 왜 못 채우느냐는 식으로 압박을 가한다”고 말했다.

텔레마케터들은 기본 통화 콜수를 채우지 못할 경우 관리자로부터 일명 ‘쪽지’(실적을 높이라는 내용 등이 담긴 온라인 메시지)를 받는 등 실적압박에 시달린다. 만약 쪽지를 계속 받았는데도 실적을 못 채우면 영업하기 더욱 까다로운 다른 센터로 강제 이동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럼에도 텔레마케터들은 “여기까지는 실적을 높이기 위한 관리방법”이라며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같은 실적을 내기 위해 업계가 만든 기이한 사내규칙들이다. 강원 A업체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하루 1인당 300~400통의 콜수를 유지시키기 위해 일명 ‘동시 이석 금지’라는 규칙을 운영 중이다. 통상 사무실 한 줄에 10~15명의 텔레마케터들이 앉아 있는데, 이들 중 두 명이 동시에 화장실을 갈 수 없도록 만든 규칙이다. 이 때문에 텔레마케터들은 다른 동료들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재빠르게 화장실을 다녀와야 한다. 이 업체에서 일하며 노동조합 지회장을 맡고 있는 손영환(37)씨는 “보통 소변은 4분, 대변은 10분 안에 해결하는 문화가 있다”라며 “아무리 실적이 중요하다지만 개인의 화장실 사용을 회사에서 관리한다는 건 텔레마케터들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기형적인 임금 체계도 텔레마케터들에겐 압박으로 다가온다. 경기 부천시에 위치한 B업체는 기본급 안에 ‘만근수당’이라는 독특한 수당이 포함돼 있다. 예를 들어 기본급이 180만원인 상담원이 1회 결근을 할 경우 15만원(만근수당의 일부)을 삭감한 165만원을 받게 된다. 이 업체에 근무하는 C씨는 “두 번째 결근부터는 약 5만원씩 추가로 삭감한다”라며 “그래서 아파도 병원에 못 가거나 집에 급한 일이 생겨도 고민 끝에 출근하는 일이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임금 체계는 위탁업무를 주로 하는 텔레마케팅 업계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카드 대출 영업을 하는 김씨는 “원청업체로부터 같은 상품을 받아서 파는 위탁업체들(텔레마케팅 업체들)의 관리자들은 경쟁업체들과 비교해 본인 회사만 실적이 유독 떨어지면 (원청과의) 재계약이 어려울 수 있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며 “이 때문에 텔레마케터들의 결근을 어떻게든 줄여 되도록 많은 전화를 하게끔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실제로 우리 회사는 서울의 M업체, 경기 부천의 U업체와 같은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데, 사측에서 세 업체의 인원수 대비 실적을 체크하다가 꼴찌가 되면 ‘이석(자리 뜨는 행위) 자제하라’ ‘옆 사람과 사담 자제하라’ ‘원청업체가 우리 업체와 재계약 안 할 수 있다’ ‘개인 지표를 관리하라’ 등의 단체 쪽지를 보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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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 전화를 건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고객의 욕설과 무시를 참아 넘기고 속으로만 울어야 한다. 상품 영업을 위해 매일 300통 이상 전화를 걸어야 하는 아웃바운더 텔레마케터의 삶은 스산하기 짝이 없다. 류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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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관행이 업계 전반에 퍼져있다 보니 사측이 아픈 직원들에게 병원을 가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손 지회장이 일하는 A업체 노동조합 소식지에는 “한 직원이 배우자, 아이와 차를 타고 가던 도중 사고가 나 이를 회사에 알리자, 이 직원이 소속된 센터장은 ‘안 나오면 결근이에요’라는 말부터 건넸다”, “하혈을 한 임산부에게 사측이 ‘수술 시간은 출근 시간을 고려해서 잡아라. 직장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져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는 등의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일감이 없을 때는 사측에서 직원들에게 무급휴가를 강요하기도 한다. 손 지회장은 “예를 들어 원청에서 카드 신규 발급을 종료하겠다고 하면, 우리 회사는 관련 업무를 하던 팀원들에게 기한 없는 무급휴가를 쓰게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같은 ‘무급휴가 강요’ 관행이 발단돼 노사 간 소송이 진행된 사례도 있다. 경기 부천시 모 휴대폰 판매 회사는 지난해 8월 휴가철 비수기를 맞아 직원들에게 보름씩 무급휴가를 쓰라고 강요했다. 당시 이 회사에서 근무했던 이모(46)씨는 “평소 월 130~170만원의 기본급을 받고 생활하는데, 15일이나 급여가 들어오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워져 정상근무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사측에 피력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측은 무급휴가를 밀어붙였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무급휴가를 쓰지 않으려면 휴대폰 개통 한 달 목표량을 종전 200개에서 320개로 올리고 미달성 시 기본급을 삭감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이씨 등 직원 8명은 이직을 결심하고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하지만 약 3개월 뒤부터 악몽이 시작됐다. 이씨는 “회사로부터 민사소송이 접수됐다는 통보를 받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라 말하며 회상했다. 당시 이 회사 근로계약서에는 ‘퇴직 1개월 전 회사에 통보해 인수ㆍ인계하고, 퇴사에 대한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돼 있는데 이 과정 없이 퇴사해 회사가 손해를 입었으니 이를 배상하라는 내용이었다. 사측은 직원 8명에게 총 1억4,466만원의 손해액을 청구했다. 당시 이 업체를 퇴사한 한모(56)씨는 “평소 급여명세서도 보여주지 않던 회사가 갑자기 거액의 손해액을 청구해와 너무 억울하고 어이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거나,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라 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법률구조공단은 “회사가 무단으로 근로조건을 변경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한 퇴직은 정당하다”고 변론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한씨는 “다행히 승소하긴 했지만, 사측은 퇴사자들에게 퇴직금을 못 주겠다고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현재 퇴직금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씨는 “수년간 함께 일했던 직원들에 무급휴가 강요, 손해배상 청구, 퇴직금 미지급 등을 일삼는 게 이 업계의 노동환경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이씨 등은 다른 업체에 취업해 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처우나 노동환경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씨는 “지금 다니는 회사와 아직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다”라며 “근무 후 3개월이 지난 뒤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업계가 대부분 다 그렇다”라며 “빠르면 15일, 길면 3개월이 지나 근로계약서를 쓰고 그 전에 퇴사하면 퇴직금을 못 받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또 몇 년을 일해도 오르지 않는 기본급 역시 업계의 잘못된 관행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박모(51)씨는 “평범한 중년 여성들은 고용 형태, 임금체계 등을 잘 알지 못한 채 그냥 계약서에 서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나도 그런 상황을 잘 모르고 계약서에 서명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위임계약(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특수고용직)이었다”라며 “이 때문에 몇 년째 똑같은 기본급을 받고 있다”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단순히 기본급을 올리는 것만으로는 텔레마케터들의 임금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주장도 나왔다. 손 지회장은 “기본급을 최저시급으로 설정해 해마다 올린다 해도 그만큼 인센티브를 내리는 게 이 업계의 실태”라며 “10년전 콜센터에서 일하며 받았던 급여와 지금 받는 급여가 똑같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노동관행에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실장은 “현재 텔레마케터의 고용 형태는 업체에 따라 특수고용직, 무기계약직 등으로 다 다르다”며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등을 개정해 이들 모두를 근로자의 범위 안에 넣는 일이 선행돼야 텔레마케터들이 잘못된 노동 관행에 대해 일괄적이고 조직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주희 기자 jxp93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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