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한국일보] 여성 할례 철폐 주장해 온 패션 모델 ‘와리스 디리’ 책 발간 사인회. 10일 광화문 교보문고. 서재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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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고백이 아니었다면 제 인생은 마비된 채 무너져 갔을 겁니다.”
‘미투(#MeToo) 운동’의 진원은 2017년의 미국 할리우드가 아닐지 모른다. 1997년 아프리카 소말리아 출신 인권운동가 와리스 디리(54)가 세상을 뒤흔든 비밀을 폭로한 그 순간이 미투의 진짜 시작 아닐까. 와리스 디리는 당시 인기 절정의 패션 모델이었다. 패션잡지 마리끌레르와 인터뷰에서 할례(여성 성기 절제) 경험을 고백했다. 패션 모델은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소비되는 존재이기에, 스스로 모델 인생을 끊을 수도 있었던 위험한 선택이었다. 당연히, 그는 마음을 또 한 번 깊이 다쳤다.
와리스 디리의 용기와 상처 덕에, 할례 문화가 상징하는 여성 인권 참상이 전세계에 알려졌다. 유엔도 나섰다. 와리스는 소말리아어로 ‘사막의 꽃’이란 뜻이다. 그는 제 이름을 딴 ‘사막의 꽃’ 재단을 2002년 설립했고, 세계를 돌며 여성 인권 향상을 외치고 있다. 여전히 싸우는 중인 그가 한 종교재단이 주최하는 선학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돼 한국을 찾았다. 10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열린 ‘사막의 꽃’ 저자 사인회에서 그를 잠시 만났다.
사인회엔 독자 200여명이 몰렸다. 와리스 디리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 여성도 있었다. 그는 그 여성을 한참 동안 안아 줬다. “한국 여성들을 직접 만나 어떻게 사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묻고 또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10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열린 '사막의 꽃' 책 사인회에서 저자이자 슈퍼모델, 여성 할례 철폐 운동가인 와리스 디리(왼쪽)가 울음을 터트린 여성을 달래고 있다. 신지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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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꽃’에는 와리스 디리가 이토록 강인해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담겨있다. 할례를 당한 뒤 뙤약볕 아래 한달 내내 누워만 있던 사연, 낙타 다섯 마리 가격에 예순 노인에 팔려갈 뻔한 일, 성폭행 위협에 수 차례 노출됐던 고통까지, 참혹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1990년대 후반 제가 책을 썼을 때 어떤 출판사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폭력적이라 잘 팔리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거죠.” 책이 나온 건 1998년이었다. 올해까지 전세계에서 1,300만여권이 팔렸다.
와리스 디리는 ‘미투 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뻔한 응원의 말을 하지 않았다. “굉장히 중요한 움직임이지만, 아프리카 혹은 제3세계 여성들을 간과하고 있어 매우 애석하다”고 꼬집었다. “미투 운동을 시작한 할리우드 스타들 중 ‘할례 철폐 캠페인’에 함께해 준 사람은 없었어요. 할례 실태에 대해 제게 묻는 사람도 손에 꼽고요. 할례는 최악의 성적 학대인데도 말이에요.”
그는 그저 투사가 아니다. 일상 속의 그는 스마트폰에 빠진 두 아들을 세상으로 꺼내는 걸 미션으로 삼는 평범한 사람이다. “여성이자 엄마로서 제 경험을 고백하고 계속 싸워가는 게 고통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제가 겪은 일들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면, 제 삶은 마비됐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멈추지 않아요. 내년엔 ‘할례를 끝내자’(End FGM)는 구호의 대형 국제 캠페인을 시작할 거예요.”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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