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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도 넘은 다국적 제약사 횡포-환자 생명 볼모로 가격 인상·공급 중단 ‘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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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간암 판정을 받은 최성규 씨(가명·58)는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이후 치료 과정에서 약이 없어 당장 치료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그야말로 ‘멘붕’ 상태가 됐다. 암 정복이 머지않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시대에 약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한다니? 최 씨는 의사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눈앞에 닥친 상황은 현실이었다.

문제가 된 약은 프랑스 제약사 게르베가 공급하는 ‘리피오돌울트라액(이하 리피오돌)’. 간암 진단 이후 수술 가능 여부를 판단하는데, 수술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통상 TACE(간동맥 화학색전술)를 시행한다. 간으로 들어가는 동맥에 항암제를 직접 주입하는 치료법이다. 이때 항암제와 함께 투여하는 것이 조영제 리피오돌. 이를 넣은 상태에서 CT를 찍으면 암세포를 쉽게 발견할 수 있고 TACE 효과를 판단하기도 용이하다. 간암 환자의 약 70%가 시술받는 TACE에 사용되는 CT 촬영 조영제는 리피오돌이 유일하다.

지난해 초 게르베코리아와 정부의 리피오돌 약가 협상이 결렬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정부가 생산 원가를 보전해주는 퇴장방지 의약품인 리피오돌 약가는 국내 도입 당시 1998년 8470원에서 2012년 5만2560원으로 올랐고, 5년이 지나 게르베 측은 26만2800원으로 5배 인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표면적인 이유는 “리피오돌의 주원료인 천연 양귀비 오일의 생산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수요 증가로 물량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싸게 쓰고 있으니 돈을 더 낼 수 없으면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얘기였다.

2021년까지 리피오돌의 독점 판매권이 보장된 게르베의 횡포였다. 재고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공급이 이뤄지지 않자 발을 동동 구르는 환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가 리피오돌 약가를 기존의 3.6배 수준인 19만원으로 인상해주면서 사태는 간신히 일단락됐다.

매경이코노미

지난해 간암 환자들의 치료 중단 위기를 불러왔던 리피오돌 사태를 비롯해 다국적 제약사의 필수의약품 가격 인상, 공급 중단 횡포가 잇따르고 있다. <권미혁 의원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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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공급 중단…환자 피해 속출

▷희귀의약품 10개 중 3개는 미출시

환자 생명을 볼모로 한 다국적 제약사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

간암 환자들의 애간장을 태운 리피오돌 사태가 발생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필수의약품의 공급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최근 일본계 다국적 제약사 한국쿄와하코기린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미토마이신’의 국내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 미토마이신은 녹내장과 라섹 수술의 보조제로 쓰인다. 처음에는 항암제로 개발됐지만 녹내장 수술의 상처를 빨리 치료해주고 라섹 수술 후 근시 퇴행이나 각막 혼탁을 억제하는 효과를 내 안과용 필수의약품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로서는 미토마이신을 대체할 만한 의약품이 없어 관련 수술을 앞둔 환자들의 피해가 클 것으로 우려된다. 쿄와하코기린은 미토마이신의 공급 중단 이유로 제조공장이 일본에서 독일로 바뀌면서 원가가 상승해 물량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당장 공식적으로 약가 인상을 요구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향후 약값 인상을 위해 전략적으로 공급을 중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약값 인상을 내세운 다국적 제약사의 의약품 공급 중단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과거 2001년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는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의 약값을 올려달라며 공급을 중단했다 여론 질타를 받은 후 공급을 재개했고, 2004년에는 다국적 제약사 로슈가 기존 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환자를 위한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의 국내 허가까지 받았지만 약값 협상이 결렬되자 아예 국내 출시를 중단했다.

이처럼 생명과 직결된 의약품 중 다국적 제약사가 우리나라에 아예 들여오지 않거나 보험 적용을 신청조차 하지 않은 약이 적잖다. 식약처에 따르면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된 318품목 중 국내에 유통되지 않은 의약품은 76품목(23.9%), 국내 미허가 의약품은 14품목(4.3%)이나 된다. 희귀의약품 10개 중 3개는 국내 환자가 구경도 하지 못하는 셈이다. 통상 희귀의약품 지정이 적절한 치료법이 없는 질환이나 기존 대체의약품보다 현저하게 효과가 개선된 약을 대상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최도자 의원은 “다국적 제약사들은 이윤을 위해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인질극을 펼치고 있다. 특히 약값을 마음대로 받기 위해 건강보험에 등재하지 않는 항암제의 경우 비급여로 치료받는 환자들이 투병 과정에서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고통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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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약값 세계 최저 수준’ 논란

▷본사 이익 높이고 세금 줄이려는 꼼수?

다국적 제약사는 국내 약값이 너무 싸기 때문에 건강보험에 등재하지 못하고 신약 출시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반박한다. 아비 벤쇼산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장은 “한국 약가는 세계 최저 수준”이라며 “적정 약가를 받을 수 없다 보니 건강보험 등재를 피하거나 수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건강보험공단은 주요 7개국(G7) 국가 약값의 가중평균을 따져 가장 낮은 가격으로 국내 약가를 정한다. 건보 재정의 건전성에 초점을 맞춘 전략이다. 그 결과 국내에 나오는 신약 가격은 OECD 국가 평균가의 45% 수준. 한국의 인색한 약가 정책이 알려지면서 다국적 제약사는 한국보다 중국에 먼저 신약을 선보이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다.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다. 한국에서 싼값으로 내놓은 뒤 더 큰 시장인 중국으로 옮겨가면 한국 약값이 참고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다국적 제약사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은 있다. 외국의 경우 우리나라와 달리 이중가격제, 비밀 계약 등이 활성화돼 있어 실제 거래되는 약가를 알기 어렵고 이 때문에 국내와의 단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논리다. 또 파악 가능한 약가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오히려 한국 약가가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다국적 제약사의 세금 포탈 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내 진출한 35개 다국적 제약사의 평균 영업이익률(2017년 기준)은 1.6%로 적자를 간신히 면한 수준에 불과하다. 내로라하는 다국적 제약사 본사 실적이 20~30%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며 펄펄 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다국적 제약사는 저조한 이익을 한국 정부 약가 인하 정책 탓으로 돌리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국내 다국적 제약사의 매출원가율은 60%대로 20%대인 본사 매출원가율보다 3배 정도 높은 수준이다. 본사에서 비싸게 약을 구입해와 본사 이익을 높이고 한국지사에서는 세금을 최대한 덜 내기 위해 일부러 이익을 낮춘다는 의혹의 눈초리가 팽배한 이유다.

한 다국적 제약사 전직 관계자는 “다국적 제약사는 한국법인이 이익을 많이 내 배당금을 챙기는 방법보다는 제품을 넘겨주는 과정에서부터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구조를 훨씬 선호한다. 이렇게 되면 한국 정부에 내는 법인세도 줄일 수 있고 부진한 실적을 빌미로 구조조정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국적 제약사 횡포 맞설 대책은

▷공공제약사 설립·민간기업 지원 필요

다국적 제약사 횡포에 맞설 대책은 없을까.

의료계는 대체의약품이 없는 다국적 제약사의 의약품 공급 중단에 대비하려면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제약사 설립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나서 국가 필수의약품 공급 계획을 수립하고 각 부처에 분산돼 있는 의약품 생산 인프라를 통해 위탁생산하거나 공공제약사를 통해 국가 필수의약품을 생산·공급하게 하는 방식이다. 공공제약사가 설립되면 현재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질병관리본부로 이원화된 필수의약품과 희귀의약품 관리체계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역할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공공제약사 설립 법안은 지난 2017년 6월 국회에 발의됐지만 제약업계 반발에 부딪혀 답보 상태다.

국내 제약사들이 대체의약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예산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필수의약품 공급 중단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사후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국내 업체 경쟁력을 키워 의약품 주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국제 공조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방침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오리지널 의약품의 독점권을 가진 다국적 제약사의 가격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오는 5월 WHO(세계보건기구) 총회에서 국제 공조를 요청하는 특별 세션을 준비 중이다. 박 장관은 “다국적 제약사들의 약가 독점 횡포는 뿌리도 깊고 국제적 마케팅 시장을 갖고 있어 개별 국가가 1 대 1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글로벌 제약산업을 이끌고 있는 스위스, 미국, 일본 등 주요 국가에 다국적 제약사의 횡포를 인식시키고 공동 대응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류지민 기자 ryuna@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95호 (2019.02.13~2019.02.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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