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7 (월)

"내 그림은 나처럼 상하좌우가 없어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백현진 작가(47)는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요즘 뮤지컬 배우들의 발성이 싫다"고 비판했다.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 개인전에서 만난 그는 "나만의 뮤지컬 '영원한 봄'을 만들겠다"고 말한 후 퍼포먼스를 펼쳤다. 붓 3개를 한 손에 쥐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영원한 봄, 널 만난 봄, 혹은 떠나는 영원한 봄, 술집서 나오는 영원한 봄, 멈칫거리다 기웃거리는 영원한 봄~."

전시장 벽에 붙인 흰 종이 위에 초록색 물감을 바르면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때로는 붓으로 강화유리 물통을 두드리며. 예술가의 끼와 '똘끼'가 충만한 퍼포먼스였다.

영원한 봄이라는 가사가 무수히 반복되는 노래를 부르는 그는 싱어송라이터. 인디밴드 1세대 '어어부 프로젝트' 멤버이자 솔로 가수로 활동한다. 박찬욱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음악감독이었고, 홍상수 영화 '북촌방향', 장률 영화 '경주',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 '내일은 사랑' 등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다. 주로 지질하거나 우울하거나 반항적인 역할이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화면 속 모습이 겹쳐 보였다. 연예 기획사에서 소속 제안이 들어오지만 연간 30일 이상 배우로 일하면 화가와 설치미술가, 퍼포머, 가수로서의 삶과 균형이 깨질 것 같아 거절했다.

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은 없으며, 그냥 재미있고 '인스턴트(일시적인) 소속감'이 정신건강에 좋아서 한다. 그는 "뭘 지도받고 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어렸을 때 통지표에 '주의가 산만하고 지도 편달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어떤 면에서 꼴통이다. 납득이 안 가면 아무리 진리라고 해도 계속 갸우뚱하고 못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1997년 홍익대 조소과를 중퇴한 그는 한동안 집에 누워만 있었다고 한다. 초·중학교 시절에 야구 유격수로 악바리처럼 훈련했던 그의 반전에 부모의 충격이 컸다. 경쟁이 싫어 야구선수를 그만뒀던 그는 제도권 교육을 박차고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홍대 앞 클럽에선 삐딱하고 자유분방한 음악을 만들어 왔다. 보수적 시각에서 보면 그는 비주류였다.

"저게 그림이냐, 저게 연기냐, 저게 노래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가사만 쓰면 방송금지되길래 방송국에 이유를 물어보면 '저속하고 저질이라서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게 2000년대 초반이에요. 심지어 연주곡도 금지시키더라고요. 그냥 내가 싫구나 생각했죠."

그래도 아는 누나들을 따라 점집에 가면 '대기만성형'이라는 점괘가 나와 마음이 편했다. 그게 적중한 걸까. 서서히 주류에 입성하고 있다. 2016년 PKM갤러리 개인전 이후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 작가로 선정됐다.

그 의미에 대해 "일하면서 운신의 폭이 좀 생긴 것 같다. 역시 포기만 안 하면 미술가로 일할 때 편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번 개인전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에서 회화 65점과 설치작품을 펼쳤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 조합으로 전시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작년 12월께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이 그려졌어요. 흙바닥에 무심히 버려져 있는 매트리스(침대)를 본 후죠. 그 이미지가 반복되고 변형돼 보였다가 물결이란 낱말이 떠올랐어요. 그들을 감쌀 수 있는 보자기가 필요해 노동요를 데리고 왔죠. 저는 작업할 때 적막감을 유지하려고 노래를 흥얼거려요. 보통 사람들은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지만요."

17일간 단식을 하면서 수행하듯이 그린 각양각색 '패턴 같은 패턴' 시리즈와 얼굴 등이 가미된 추상화 65점이 전시장 벽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작가는 "내 그림은 상하좌우가 없다. 돌려 가면서 그린다. 조합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 바닥에 놓아도 냉장고 위에 올려놔도 좋다"고 말했다. 작업실 한 면이 통유리여서 오전 7시부터 자연광을 받으면서 그려서인지 화면이 밝다고.

그는 "한남충 꼰대 나이다. 청년 시절에 너무 어른을 싫어했고 분노했기 때문에 덜 구린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전시는 3월 31일까지.

[전지현 기자 / 사진 = 이승환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