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시상식의 파급력은 1998년을 정점으로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밀려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90년 역사가 담긴 권위는 여전히 높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구리와 주석 합금으로 만들어진 제작비 350달러짜리 오스카 트로피는 전 세계 영화인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기념품입니다.
때론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그럴 때마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이끌어가는 아카데미 위원들은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비판을 누그러뜨렸습니다. 유색인종, LGBTQ 등 마이너리티를 조금씩 포용하고 있고, 정치적 발언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치적 발언을 허용하는 것은 지난 시절 할리우드가 매카시즘 등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기에 영화인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식 변화에 따른 것입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매년 주목받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중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지구상에서 열리는 영화 시상식 중 가장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쇼라는 점일 것입니다. 지난 90년 역사 동안 아카데미 시상식은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습니다. 오는 2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릴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기억할 만한 장면 10가지를 꼽아봤습니다.
194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흑인 배우 해티 맥다니엘이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받고 있다. 그녀는 오스카 역사상 최초로 수상한 흑인으로 기록됐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40년 오스카를 받은 최초의 흑인 해티 맥다니엘
제1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여우조연상 시상을 앞두고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흑인 배우가 후보에 오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곧 역사에 오랫동안 기록될 사건이 벌어집니다. 유일한 흑인 후보가 수상자로 호명된 것입니다. 이날 8개 부문의 상을 휩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해티 맥대니얼은 노예 역할을 맡은 조연이었지만 이날만큼은 당당히 주인공이었습니다.
트로피를 손에 쥔 맥대니얼은 수상소감에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오스카를 수상한 최초의 흑인으로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이후 흑인 여성 배우가 또다시 오스카를 받는 데는 51년이 더 걸렸습니다. 1991년 '사랑과 영혼'의 우피 골드버그가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이 두 번째입니다.
맥대니얼은 커리어를 계속 이어갔고 1947년 흑인 최초로 라디오 쇼의 주인공을 맡아 또 한 번 역사를 새로 쓰게 됩니다.
2002년 흑인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할리 베리가 눈물을 흘리며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
2002년 할리 베리 최초의 흑인 여우주연상
'몬스터 볼'에서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형수의 아내를 연기한 핼리 베리는 2002년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흑인이 받은 최초의 여우주연상입니다. 남우주연상의 경우엔 1964년 '릴리 꽃밭'의 시드니 포이티어가 최초의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같은 흑인이어도 주연상을 받는 데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더 걸릴 정도로 흑인 여배우에게 오스카의 벽은 높았습니다.
2010년 `허트 로커`로 여성 최초로 감독상을 받은 캐서린 비글로우가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10년 캐스린 비글로 최초의 여성 감독상
이라크의 폭발물 제거반을 소재로 한 저예산 영화 '허트 로커'는 2010년 작품상, 감독상 등 6개 부문에서 수상했습니다. 이 영화를 만든 캐스린 비글로는 '아바타'를 만든 전 남편 제임스 캐머런을 제치고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여성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것은 이때가 최초입니다.
"여성이 영화를 만드는 데 장애물이 있다면 나는 그걸 무시할 것입니다. 나는 내 성별을 바꿀 수 없고, 영화 만들기를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영화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 영화에 반응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더 많은 여성들이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1973년 말론 브란도는 남우주연상 수상을 거부하며 사친 리틀페더라는 아파치족 행동가를 대신 무대로 보내 원주민에 대한 할리우드의 부당한 대우를 항의하게 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73년 남우주연상을 거부한 말런 브랜도
197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말런 브랜도는 '대부'로 두 번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상을 받으러 무대로 올라간 사람은 그가 아닌 아파치 원주민 옷을 입은 한 여성이었습니다. 사친 리틀페더라는 이름의 이 여성 행동가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상을 거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화 산업에서 미국 원주민들이 잘못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9년 `다크나이트`의 히스 레저가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자 고인의 가족이 대신 무대에 오르고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09년 히스 레저 남우조연상 사후 수상
남우조연상 수상자가 호명되자 무대에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이 함께 오릅니다. 트로피를 받아야 할 배우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대리수상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아카데미에서 사후 수상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를 연기한 히스 레저는 촬영을 마친 후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28세여서 다재다능한 유망주의 죽음에 할리우드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히스의 가족은 오스카 트로피를 히스와 미셸 윌리엄스 사이에서 태어난 3살난 딸 마틸다에게 주었습니다.
197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며 12분간 기립박수를 받은 찰리 채플린.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72년 12분간 기립박수 받은 찰리 채플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장 기립박수 기록은 찰리 채플린이 갖고 있습니다. 1972년 그가 특별상을 수상하기 위해 무대에 섰을 때 무려 12분 동안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영화 역사상 위대한 혁신가이자 유머와 휴머니티를 영화 속에 담아낸 희비극의 제왕이자 그 자신이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채플린은 그러나 냉전시대 공산주의자로 몰려 할리우드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을 공산주의자라며 찍어누르던 광기 어린 매카시즘의 피해자였던 그는 뒤늦게 복권돼 할리우드 최고 무대에 섰습니다. 20년 동안 묵혀 있던 1952년작 '라임 라이트'가 처음 공개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채플린은 긴 박수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그러고는 특유의 중절모와 지팡이를 들고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2017년 시상식 관계자가 무대에 올라 `라라랜드`가 아닌 `문라이트`가 작품상 수상작이라고 정정하고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17년 뒤바뀐 작품상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전설적인 배우 워런 비티와 페이 더너웨이가 작품상을 발표하기 위해 무대에 오를 때만 해도 이 순간이 또 다른 전설적인 순간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실수로 작품상 봉투가 아닌 여우주연상 봉투가 건네졌는데 페이 더너웨이가 이를 모르고 그냥 거기 써 있는 영화 제목인 '라라랜드'를 읽어버린 겁니다. 여우주연상은 '라라랜드'의 에마 스톤이 받았거든요. 하지만 실제 심사위원단이 선정한 수상작은 '라라랜드'가 아니라 '문라이트'였습니다.
이제 난리가 났습니다.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시상식에서 전례 없는 수상작 정정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영화상의 꽃 중의 꽃,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놓고 벌어진 대실수입니다.
'라라랜드' 팀이 무대에 올라와서 기쁨을 만끽하고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을 때 누군가 올라와서 마이크에 대고 이렇게 말합니다. "진짜 수상작은 '문라이트'입니다. 농담 아닙니다." 그 순간 워런 비티의 얼굴은 사색이 됐습니다.
10분 동안 대혼란이 벌어졌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상황이 대충 정리됐을 때 '라라랜드' 팀은 '문라이트' 팀을 응원하며 무대에서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후 계속해서 회자되며 '문라이트'보다 더 주목받았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정보에 따르면 봉투를 잘못 전달한 사람은 아카데미 시상식 회계를 담당하는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의 회계사 브라이언 컬리넌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는 이 사건으로 다시는 아카데미 일을 맡지 못하게 됐습니다.
2014년 아카데미 시상식 생방송 도중 엘렌 드네제러스가 올린 셀피. 320만번 리트윗되며 당시 오바마를 누르고 신기록을 세웠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14년 엘런 디제너러스의 셀카
아카데미 시상식이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진은 2014년 생방송 도중 사회자 엘런 디제너러스가 수많은 스타들과 함께 찍은 셀카(selfie)입니다. 엘런은 이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고 320만번 리트윗되면서 신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엘런은 원래 메릴 스트리프와 단둘이 셀카를 찍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줄리아 로버츠, 브래들리 쿠퍼, 제니퍼 로렌스, 케빈 스페이시, 브래드 피트, 앤젤리나 졸리, 루피타 뇽오, 재러드 레토, 채닝 테이텀 등이 몰려들면서 아카데미 시상식의 역사적인 순간을 남겼습니다. 2000만달러를 들여 갤럭시노트를 협찬한 삼성도 홍보 효과를 톡톡히 봤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는 점점 시청률이 감소하는 추세인데 소셜미디어와 생방송을 결합한 이 시도는 이것이 단지 그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스타들이 팬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게 만드는 축제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셀카를 찍기 전에 엘런은 피자 집에 전화를 걸어 피자 배달부가 생방송에 직접 출연하게 했고, 브래드 피트를 비롯한 톱스타들에게 피자 서빙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동경의 대상인 아름다운 드레스와 턱시도의 잔치이지만 시청자와 무대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이런 파격적인 시도는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974년 작품상 발표 직전 영국배우 데이비드 니븐 뒤로 한 남자가 나체 상태로 뛰어가고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74년 나체 남자의 시상식 침입
스포트라이트는 미국의 전설적인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국 배우 데이비드 니번이 그녀를 소개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무대 뒤에서 한 남자가 나체로 등장해 앞으로 달려나옵니다. 객석의 사람들이 웃으며 소리를 질렀고 데이비드는 잠시 당황해하다가 예정대로 엘리자베스를 소개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예정대로 작품상 수상작('스팅')을 발표하며 쇼를 마무리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나체 남자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나중에 로버트 오펠로 밝혀진 이 남자는 프로페셔널 스트리커 아티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당시 33세였던 그의 몸을 가린 것이라곤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과 콧수염밖에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오펠은 경찰에 체포되거나 시상식에서 쫓겨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자회견까지 열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누드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해선 안돼요." 당시 그가 기자회견에서 한 말입니다.
이후 그는 사진을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LGBT 잡지의 편집자로 일하다가 1976년엔 뜬금없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당시 슬로건은 "아무것도 감추지 마"였습니다. 워터게이트로 사임한 닉슨을 겨냥한 슬로건이었습니다.
낙선 후 1978년 게이들을 위한 갤러리를 열고 활동하던 그는 1979년 39세의 나이로 불행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7월 7일 밤 갤러리에 침입한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한 것입니다.
1998년 역사적인 기록을 남긴 `타이타닉`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한 후 "나는 왕이다"라고 외치고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98년 "나는 왕이다"라고 외친 제임스 캐머런
1998년 시상식은 90년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 수를 기록했습니다. 생중계를 지켜본 사람이 5500만명에 달합니다(2018년 시상식 시청자 수는 절반으로 떨어진 2600만명이었습니다). 당시 시상식을 휩쓴 영화는 '타이타닉'입니다. 무려 11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갔습니다. 11개 부문 석권은 '벤허'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과 함께 역대 최다 공동기록입니다.
이전까지 많은 히트작을 남겼던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타이타닉'으로 두 번째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감독상을 받으며 영화에 참여한 동료들 이름을 하나씩 거명한 뒤 마지막으로 "나는 왕이다"라는 외침으로 소감을 마무리했습니다. 이 대사는 영화 속에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뱃머리에서 소리친 대사를 따라한 것입니다만, 제임스 캐머런의 독불장군 이미지와 맞아떨어져 이후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습니다.
[양유창 기자 sanity@mk.co.kr]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