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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매경춘추] 순서 지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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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어려서부터 우리는 줄을 서고 순서를 지키는 법을 배우지만 배운 만큼 실천하지는 않아 곳곳에서 새치기가 일어나고 그로 인한 다툼이 생겨난다.

번호표를 발부하는 은행이나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는 이런 새치기가 사라졌지만 문제는 번호표가 없는 일상 공간이다. 그중 흥미로운 장소는 식당과 화장실이다.

영화관 건물에 있는 여자화장실에는 영화가 끝난 직후에 보통 줄이 길게 늘어선다. 모두 화장실 통로에서 한줄서기로 순서를 기다리는데, 꼭 모른 척하고 혼자 문 앞에 가 있다가 누가 나오면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다들 무심하고 초연히 줄을 서 있는 것 같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나온다. 귀신같이 아는 것이다.

식당에서는 먼저 온 사람이 먼저 배식을 받는 게 암묵적인 권리이다. 복잡한 요리를 파는 식당이 아니라 단품만 파는 식당이라면 그 권리는 절대적이다.

우리 동네 국숫집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인데, 주인 할머니가 가끔 착각을 일으켜 먼저 온 사람을 제쳐두고 늦게 온 사람에게 국수를 주면 매우 긴장된 풍경이 펼쳐진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먼저 온 사람이 귀신같이 알고 고개를 든다.

자기 몫의 국수가 잘못 배식된 곳을 한번 보고 주인 할머니를 한번 본다. 그러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늦게 온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젓는데, 실은 그 사람도 귀신같이 알고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할머니가 순서가 바뀐 걸 알아채고 국수를 도로 가져갈까 봐 표정은 아무 생각 없지만 손은 그토록 민첩히 움직여 국수부터 휘젓고 보는 것이다.

그럴 때 종종 나라면 어떨까 상상한다. 먼저 온 사람이라면 가벼운 항의를 할까, 그냥 참고 넘어갈까. 늦게 온 사람이라면 그냥 후딱 먹을까, 순서를 정정할까. 늦게 온 사람일 경우가 애매하다.

내가 일부러 새치기를 한 건 아니니까, 그냥 주는 대로 먹은 것뿐이니까, 나는 정말 몰랐으니까. 그런 식의 변명이 떠오르니 어려서 배운 규칙은 간단명료한데 순간의 결정은 그렇게 복잡 치사하다. 모르는 것도 죄인 줄 모르고. 아무도 모를 줄 알고. 다들 귀신같이 아는데 나만 모르고.

[권여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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