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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신선한 도전 돋보였던 CJ 예능 ‘예전 같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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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요즘 씨제이 예능

‘시청률 1%’ 시절에 빛났던 노력

지상파 추격 예능 정상 올랐지만

최근 안팎의 조용한 평가는

‘색깔 잃었다’ ‘고만고만하다’

치열한 내부경쟁 시스템 속에서

위험한 시도보다 자리 굳히기?

시청률 의식 안전한 제작 탓일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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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대화- “씨제이(CJ) 예능이 이제 예전 같지 않아요.” 아직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1월 하순, 여러 방송사들이 옹기종기 입주한 서울 상암 디지털미디어시티의 한 카페에서, 지상파 채널 소속의 한 프로듀서 ㄱ씨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참이었다. 뜻밖의 말에 나는 놀란 눈으로 ㄱ씨를 바라보았다. 나영석 사단이 연이어 선보이는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시리즈, <삼시세끼> 시리즈, <신서유기> 시리즈(이상 티브이엔(tvN) 예능) 같은 킬러 콘텐츠, 올리브(Olive) 채널이 송은이 김숙의 컨텐츠랩 비보와 손잡고 만든 <밥 블레스 유>, 엠넷(Mnet)의 양대 펀치인 <프로듀스> 시리즈와 <쇼 미 더 머니> 시리즈가 있는데, 씨제이이엔엠(CJ ENM) 예능이 예전 같지 않다고? 지상파 채널이 지금 씨제이 채널들의 예능을 얕잡아봐도 좋을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인가?

약세였던 종편채널들 최근 약진

ㄱ씨는 진지했다. “티브이엔 예능들을 보면, 나영석표 예능을 제외하면 신선함을 잃은 지 좀 된 거 같아요. 오히려 지금은 종합편성채널들이 더 공격적으로 예능을 잘 만들려 노력하는 거 같고요.”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2018년 화제를 모았던 신규 예능 프로그램 중 좀 새롭다 싶거나 입소문을 탄 작품의 상당수는 채널에이나 티브이조선의 작품들이었다. 연애 예능 열풍을 다시 몰고 온 <하트시그널> 시리즈로 10~20대 시청자층을 공격적으로 공략한 채널에이는 <지붕 위의 막걸리>나 <우주를 줄게>, <워터걸스>와 <보컬플레이> 등 2049를 겨냥한 예능들을 숨 돌릴 틈 없이 쏟아냈다. 마이크로닷의 불미스러운 하차에도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는 큰 흔들림 없이 순항 중이다. 티브이조선도 작년이 바빴다. <땡철이 어디가>와 <라라랜드>로 간을 보던 티브이조선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아내의 맛>과 <연애의 맛> 두 프로그램을 통해 채널 이미지 개선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시사와 보도 분야에서 수년간 쌓아 올린 극우적 이미지, 5060 이상의 시청자들을 겨냥하는 노쇠한 채널이라는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해 두 종편채널은 작년 한 해 예능으로 전력투구를 했다.

ㄱ씨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씨제이로 옮겨간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가서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은 모양이더라고요. 연차에 따라 비교적 안정적으로 올라가는 지상파에 비하면 그쪽은 경쟁도 치열하고요. 지상파에는 노동조합이라도 있지, 거기는 노조도 없잖아요. 피디들을 보호해줄 만한 장치는 더 적고, 환경도 지상파와 다르고요.” 물론 그렇다고 ㄱ씨가 씨제이에 대한 지상파의 자신감을 드러낸다거나 근거 없는 낙관을 하는 건 아니었다. ㄱ씨는 대화의 더 긴 시간을 자사의 상황에 대한 냉철한 자아비판에 할애했다. 하지만 이래저래 신기한 일이었다. 불과 몇년 전만 하더라도 지상파 채널의 프로듀서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보면 씨제이를 향한 질시와 동경으로 한껏 위축되어 있다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지상파 피디들 입에서 “씨제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건, 뭔가 바뀌고 있는 신호 같았다.

두번째 대화- “애매하게 지상파 예능의 짝퉁 카피 같은 걸 만들고 있어요. 답답해요.” 몇주가 지난 2월 말, 씨제이이엔엠 소속 ㄴ씨와의 대화에서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래도 타사의 일이라 그 평가가 조심스러웠던 ㄱ씨와 달리, ㄴ씨는 비교적 더 냉정한 말투로 자사의 흐름을 토로했다. 시청률이 1%대가 나오면 대박이라 평가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다들 새롭고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집중했는데, 티브이엔이 지상파보다 더 잘나가는 채널이라는 인식이 자리잡힌 이후부터는 오히려 어느 정도 시청률이 나와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몸을 사리고 고만고만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지상파의 지위를 위협하는 도전자 위치에 있을 때는 겪지 않았던 일들이, 선두주자를 제치고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다급한 현실이 되었다. 이를 악물고 쫓아오는 종편과 지상파를 견제하자니 시청자층을 더 넓게 확보해야겠고, 정상의 자리를 굳건하게 다지자니 위험한 선택은 못 하겠고.

“아니, 그래도 지상파에서 일 잘한다던 피디들 무더기로 모셔 갔잖아요. 그런데도 그래요?” “그게 또 문제예요. 프로그램을 만드는 인력이 늘어났으니, 그만큼 내부의 경쟁도 심해지는 거죠.” “예전에는 그래도 이명한 시피(CP·책임프로듀서), 김석현 시피 같은 분들이 중심을 잡고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았나요?” “그분들 다 상무로 승진하셨잖아요. 그만큼 실무에서는 조금 멀어지신 거죠.” ㄴ씨의 목소리엔 얕은 한숨이 서려 있었고, 그의 말을 듣는 나는 당혹스러웠다. 티브이엔의 화려한 드라마 라인업과 나영석 사단이 선보이는 예능들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경쟁에서 밀릴까 두려워 안전하고 무난한 선택을 했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미처 못 봤던 것이다. “작가님, 자세히 살펴보세요. 요즘 저희 예능 중에, 지상파나 종편에서 만들 법한 프로그램들, 그것도 지상파보다 못 만든 프로들이 많아요.”

지상파만큼 고루해지는 시대 오다니

그래, 좀 이상하긴 했다. 티브이엔이 화요일 밤 11시 블록에 신규 편성한 <상암타임즈>는 종편채널에서나 볼 법한 정치시사 토크쇼의 문법을 피하지 못했다. 그나마도 굳이 ‘시사알못’을 ‘시사잘알’과 같이 붙인다는 포맷 탓에 종편채널의 그것만큼 대화가 깔끔하지도 않다. 게다가 전원 남성 패널이라니. 한국방송(KBS)이 여성 진행자들로만 구성된 시사토크쇼 <거리의 만찬>을 선보이는 시절에, 그보다 앞서 온스타일을 통해 전원 여성 패널이 진행하는 <뜨거운 사이다>를 선보였던 씨제이이엔엠이 만든 정치시사 토크쇼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시대착오적이다. <내 손안에 조카티비>는 어떤가. 이른바 ‘조카바보’ 연예인들과 어린이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의 협업으로 ‘조카바보’ 시청자들을 공략하겠다는 기획은, 에스비에스(SBS)가 설 특집 파일럿으로 선보인 <요즘 가족: 조카면 족하다?>에 이슈를 선점당했다. 지상파가 선보일 만한 발상의 프로그램을, 지상파보다 늦게 선보인 셈이다. 파일럿 방영 때 시사평론가 전원책의 고압적인 태도 탓에 논란이 일었던 <나이거참>은, 그나마 정규 편성 후에는 논란조차 일지 않는다. 세상에, 씨제이가 지상파만큼 고루해지는 시대가 오다니.

세번째 대화- “다른 팟캐스트 채널에서 선보이는 형식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모 인터뷰 팟캐스트를 제작하는 ㄷ씨. 그가 만드는 방송은 다른 팟캐스트 방송들처럼 진행자와 출연자 사이의 대화를 자연스레 살리는 대신, 진행자가 던진 질문을 편집을 통해 도려내고 오롯이 출연자의 대답만을 다듬어 독백처럼 살려낸다.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 각자가 지닌 고민과 아픔, 독특한 체험 등의 자전적 이야기를 고백하고, 그를 통해 듣는 이에게 위로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특성을 생각하면 그와 같은 형식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른 팟캐스트들과의 경쟁이나 순위를 의식하는 대신, ㄷ씨는 자신이 콘텐츠 안에 담아내고자 하는 가치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식만을 고민했다. 덕분에 이 팟캐스트는 여타 다른 방담 형식의 팟캐스트와는 사뭇 다른 질감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지상파가 한참 씨제이이엔엠의 추격을 당하던 시절, 지상파는 창피함을 모르고는 엠넷의 <슈퍼스타케이> 시리즈를 흉내 낸 오디션 프로그램을 양산했고, 그 탓에 자신들만의 색깔을 잃었다. 씨제이이엔엠은 정상에 오른 순간, 더 많은 시청자층을 확보해 정상을 굳혀야 한다는 마음에 지상파와 큰 차이 없는 고만고만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저마다 경쟁에서 살아남겠다는 판단에 급급해,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주는 특징들을 포기하고 스스로 뻔해지는 일이 반복되는 중이다. 어쩌면 ㄷ씨의 판단이 옳았는지 모른다. 자신들만의 가치와 방식을 잃어버린다면 누구라도 ‘원 오브 뎀’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수년 전 지상파가 그렇게 몰락했듯이, 지금 씨제이가 그 위기에 처해 있듯이.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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