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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단독] ‘진보색 헌재’… 위헌결정 크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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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법·집시법 줄줄이 위헌… 사회변화·정권 성향 반영 / 헌재소장 공석 등 내부적 요인도 작용 / 2018년 처리 건수 전년 2411건보다 적어 / 4월 재판관 9명 중 6명이 ‘진보 성향’ / 국회 보완입법 소홀 위헌 취지 빛바래 / 야간옥외집회 금지법 등 대표적 사례 / 삼권분립 논란 우려 문제제기도 못해

세계일보

“재판관 6(헌법불합치)대 3(각하) 의견으로 병역법 5조 1항은 헌법불합치로 결정합니다.”

지난해 6월 헌법재판소는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은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국군 창설 70년 만에 종교적 이유에 따른 대체복무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병역법 5조 1항은 병역의 종류를 현역·예비역·보충역·병역준비역·전시근로역 5가지로만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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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는 “양심적(종교적) 병역 거부자의 수는 병역자원 감소를 논할 정도가 아니고, 이들을 처벌해도 병역자원으로 활용할 수 없다”며 “대체복무제 도입으로 병역자원 손실이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2019년까지 대체복무제를 반영한 보완입법을 지시했다.

같은 해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헌재 결정을 존중해 병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오모(34)씨에게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1968년 확립된 유죄 판례가 변경됐다. 이후 국방부는 36개월간 교정시설에서 합숙하도록 하는 ‘병역법 개정안’과 ‘대체역의 편입 및 복무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문재인정부 2년차를 맞은 지난해 헌재가 헌법소원 심판사건(위헌법률심판·탄핵·정당해산·권한쟁의 제외) 중 90건의 위헌(단순위헌·헌법불합치·한정위헌) 결정을 내리며 지난 6년간 가장 많은 건수를 기록했다. 4건에 불과한 2017년 대비 23배가량 껑충 뛰었다.

지난해 병역법 5조 1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종교적 병역거부의 길이 열린 것처럼 사회적으로 상당한 변화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특히 다음 달이면 조용호·서기석 재판관이 퇴임하고, 현 대통령이 지명하는 두 재판관이 새로 임명돼 헌재의 진보적 색채가 더 짙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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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 전년 대비 23배 증가

전문과 본문 130개조, 부칙 6개조로 구성된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 국가 조직을 규정한 최고 상위법이다. 1988년 문을 연 헌법재판소는 최고법인 헌법에 근거해 일반 법률안의 위헌 여부를 심리한다.

18일 세계일보가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실로부터 입수한 ‘헌법재판소의 헌법소원심판사건 접수·처리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헌재는 90건의 위헌 결정을 내렸다. 전년도 위헌결정 건수 4건 대비 23배나 늘었다. 2015, 2016년 헌재가 각각 40건, 29건의 위헌 결정을 내렸다는 점과 비교해도 지난해 위헌 결정 수치가 상당히 증가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는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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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본지가 지난해 헌재가 처리한 2403건을 전수조사한 결과, 병역법 5조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서 위헌 결정이 많이 내려졌다.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의 경우 22건이 병합돼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이 중에는 2011년 12월에 접수돼 7년 만에 위헌 결정이 내려진 것도 있었다.

이외에도 지난해 5월 국회의사당 등 100 이내 집회를 금지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11조도 헌법불합치 결정(2013년 9월 헌법소원 접수 사건 등)이 내려졌다. 지난해 8월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18조 2항에 대한 위헌 결정(2014년 4월 〃)이 내려져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피해자들의 보상 길이 열렸다. 같은 달 과거사 사건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청구권에도 민법상 소멸시효제도를 적용하도록 한 민법 166조 1항도 위헌 결정(2014년 2월 〃)이 이뤄졌다.

◆“정부 성향 변화 영향 무시 못해…헌재 진보적 색채 더 짙어질 듯”

헌재의 위헌 결정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는 헌재를 둘러싼 내·외부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우선 2017년 1월부터 10월까지 헌재소장이 공석인 탓에 중요사건 선고가 지연됐다. 헌재 측은 “2017년 1∼10월 헌재소장이 공석인 탓에 중요사건 선고가 미뤄졌고, 그해 11월 헌재소장이 임명된 이후 사건처리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사회적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본지 전수조사 결과 지난해 헌재가 처리한 사건 수는 2403건이다. 위헌 결정이 4건에 불과한 2017년은 2411건으로 그해 더 많은 사건이 처리됐다. 헌법 전문가들은 위헌 결정 증가는 사회적 변화가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한상희 교수는 “병역법과 집시법에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은 세계적인 인권 흐름 등 사회변화에 헌재가 대응한 것”이라며 “병역법의 경우 남북 간 긴장완화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치환경 변화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헌법 111조에 따르면 헌재 재판관 9명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대통령이 소장을 포함해 3명, 대법원장과 국회가 각각 3명씩 지명한다. 다만 최종 임명 권한은 대통령이 갖고, 재판관 3명을 지명할 수 있는 대법원장도 대통령이 임명할 정도로 대통령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헌법 전문가들은 다음 달 두 재판관이 퇴임하면 헌재의 진보적 색채가 짙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본다. 두 재판관 후임은 모두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권한을 갖는다. 재판관 9명 중 위헌정족수인 6명이 대통령과 현 대법원장, 더불어민주당이 지명한 인사로 채워진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는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하는 상황에서 재판관 6명이 대통령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명해 지난해 임명된 이석태 재판관의 경우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참여정부 시절 공직기강비서관을 지냈고 2012년에는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문 대통령이 지명한 유남석 헌재소장은 진보적 성향의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다. 정주백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는 “헌재 결정도 정치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사회변화라고 하지만 재판관 구성 변화라는 분석이 더 사실적”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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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헌 결정하고 끝?…소홀한 보완입법에 사문화된 법

헌재가 헌법불합치 등 위헌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껑충 뛰었지만 국회의 보완입법 노력은 부족하다. 이에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 취지와 달리 특정 법률은 사문화되기도 한다. 헌법불합치는 위헌의 종류이지만 곧바로 효력이 상실되는 단순위헌과 달리 특정시점까지는 법률의 효력을 인정하도록 한다. 국회는 해당 시점이 지나기 전까지 보완입법을 해야 한다.

이날 헌재에 따르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국회에 특정시점까지 보완입법을 하라고 요청했지만 시간이 지나 현재 기준으로 법률이 사문화된 경우는 총 5건이다. 대표적인 것이 야간 옥외집회다. 2009년 9월 헌재는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시법 10조 등을 5(위헌)대 2(헌법불합치)대 2(합헌)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10년 6월까지만 한시적으로 해당 조항을 적용하고 그 전까지 국회가 보완입법을 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국회는 보완입법안을 내놓지 않았고 야간 옥외집회 금지조항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외에도 △통신비밀보호법 6조 7항 △국민투표법 14조 1항 △공직선거법 56조 1항 2호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지만 보완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사문화됐다.

헌재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회에 보완입법을 촉구하는 행위는 자칫 삼권분립 침해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헌재 관계자는 “헌재는 헌법소원이 들어왔을 때 판단만 할 수 있다”며 “보완입법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서 국회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헌재 연구관 출신 노희범 변호사는 “국회가 보완입법을 하지 않아 야간옥외집회는 아예 제한이 없어졌다”며 “헌법불합치뿐 아니라 한정위헌의 경우에도 국회와 정부가 적극적으로 보완입법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염유섭 기자 yuseob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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