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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정남진의 봄은 수줍어 그렇게 빨~갛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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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정남쪽

장흥으로 봄을 마중 나갔다

경향신문

장흥에는 면적 20㏊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동백 군락지가 있다. 3만그루 이상의 동백나무가 만든 붉은 꽃터널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더욱 호젓하고 비밀스러운 산책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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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반도 끄트머리에 붙은 천관산

활짝 핀 동백꽃이 온 산을 덮었다

초록빛 보리밭과 어울려서 더 붉다

동학운동 ‘녹두장군’ 무대이기도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은 온다. 봄도 그렇다. 때 되면 알아서 올 텐데 그래도 마중 나가 맞게 되는 게 또 봄이다. 서울 광화문에서 정(正)남쪽에 위치한 ‘정남진’ 장흥으로 향했다. 봄의 길목으로 떠난 여행이다.

고려 인종이 ‘길이 흥할 고장’이라 이름 붙인 장흥엔 봄기운 물씬 풍기는 국내 최대 동백 군락지가 있다. 다도해 품은 바닷가로 나가면 청정해역에서 건진 신선한 제철 해산물이 입맛을 당긴다. 봄나물과 지역 특산물이 그득한 전통시장에도 봄은 이미 성큼 와 있었다. 산(표고버섯)과 바다(키조개), 육지(한우)의 맛이 어우러진 장흥 삼합처럼 장흥의 봄여행도 풍성하고 꽉 찬 맛이 있었다.

■ 동백 주단 깔린 숲길의 ‘붉은 유혹’

경향신문

산, 바다, 그리고 시장 천관산 동백숲에서 시작한 장흥 봄맞이 여행은 키조개와 바지락이 제철을 맞은 득량만 앞바다 소등섬(아래사진)을 거쳐 정남진토요시장에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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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반도 끄트머리에 붙은 천관산(723m)은 능선을 둘러친 기암괴석이 아름다워 ‘천자의 면류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호남 5대 명산이다. 본래 가을철 억새로 유명했는데 최근엔 동백숲이 입소문을 타고 있다. 천관산 북쪽 자락 골짜기를 온통 뒤덮은 동백숲은 면적이 20㏊로 국내 최대 규모다. 기록 인증을 위해 10개월에 걸쳐 일일이 세어본 동백나무만 3만그루, 그 이상은 구태여 집계하지 않았다고 한다. 방대한 동백림은 멀리서 보면 산자락에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모양새다. 관산읍에서 천관산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진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다 보면 옆으로 온통 붉은 동백꽃 천지다. 고도가 높아 천관산 동백숲은 4월 초까지 만개한 동백꽃을 감상할 수 있다.

숲에는 편의시설로 1㎞ 내외의 탐방로 4개와 숲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격의 정자 2곳이 마련돼 있다. 탐방로는 경사가 조금 있고 오르내리는 길이 편하진 않지만 빽빽한 나무 사이로 땅에 떨어진 동백꽃 융단 위를 산책하는 기분이 황홀하다. 좁은 골을 따라 흐르는 개울에도 붉은 꽃이 졸졸 흐른다. 높다란 우듬지 사이로 빛이 들면 진녹색의 동백 잎은 마치 기름을 바른 듯 새초롬하게 반짝인다.

묵촌리도 동백숲으로 장흥에서 유명한 마을이다. 1999년 IMF 환란으로 경제가 어려울 때 실업구제 대책의 일환으로 조림사업을 한 것이 지금은 사진 찍기 좋은 관광지로 외지까지 이름이 났다. 약 2000㎡ 부지에 140여그루의 동백나무가 들어찼는데, 수령이 200~300년씩 된 아름드리 그늘 아래 동백꽃이 붉게 깔린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숲 바로 옆은 한참 초록빛이 움튼 보리밭이어서 새빨간 동백 주단이 한층 돋보인다.

묵촌마을은 장흥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이방언(1838~1895)의 고향이다. 동학운동을 다룬 송기숙의 대하소설 <녹두장군>의 무대로도 알려져 있다. ‘새 세상을 꿈꾸다 스러진 뜨거운 열망’이 모가지째 뚝뚝 떨어진 동백꽃에서도 느껴진다고 하면 지나친 상상일까.

■ 봄 바다가 선물한 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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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와 바다로 향했다. 장흥 바다엔 시방 봄을 알리는 갯것들의 축제가 한창이다. 용산면 남포마을로 차를 몰았다. 해안에서 100여m 떨어진 소등섬까지 하루 두 번 물길이 열리는 ‘모세의 기적’으로 유명한 동네다. 이청준의 소설 <축제>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촬영지로도 알려진 곳이다.

작은 갯마을 비닐하우스에는 직접 잡아온 해산물을 다듬는 여인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키조개를 가득 쌓아두고 손질하던 김명단 할머니(68)는 “바로 어제 잡아온 것”이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을 꺼냈다. 보통 수심 20~50m에 서식하는 키조개는 잠수부(머구리)가 채취한다. 장흥 득량만에선 일년에 딱 두 번,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음력 영등살(2월)과 백중살(7월) 때 이틀씩 장화를 신고 뻘에 걸어 들어가 키조개를 캘 수 있다. 그렇게 잡은 키조개는 관자만 발라내 김칫국을 끓여 먹거나 떡국에 넣어 먹는다. 싱싱한 것은 초장을 찍어 날것으로 먹기도 하고 깨끗이 씻어 제사 드릴 때 전으로 부쳐내기도 한다. “요놈이 크기는 잘아도 맛은 종패 뿌려 키우는 양식 키조개랑 댈 것이 아녀. 요런 것은 어디 시장에 가도 구경을 못해. 잘 발라가지고 자식들헌티 보내줘야지.” 이웃 마을에서 시집와 40년을 남포마을에서 살았다는 김 할머니의 손이 다시 분주해졌다. 옆자리에 앉아 말없이 굴을 까던 다른 할머니는 소쿠리에 한가득 담은 굴을 바닷물에 슥슥 헹구더니 하나 집어먹어보라고 들이밀었다. 달큼하고 향긋한 맛이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바다로 내려오면 ‘갯것들의 축제’

키조개 까고 있는 할머니가 정겹고

시장에서 맛보는 한우 ‘장흥 삼합’

어머니 텃밭 장터는 봄맛을 전한다


회진면에 위치한 ‘정남진 해양낚시공원’은 감성돔이 잘 잡혀 사철 강태공이 몰리는 낚시 포인트다. 공원 입구에는 조그만 수협 위판장이 있고 득량만에서 잡아올린 낙지와 붕장어, 키조개 경매가 수시로 열린다. 천천히 구경하다 보면 앞바다에 떠 있는 색색의 점들이 눈길을 끄는데, 모두 김 양식에 사용되는 부표다.

장흥은 김 양식을 할 때 잡조류를 없애기 위해 흔히 뿌리는 염산이나 유기산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햇빛과 바람에 노출되며 자라는 장흥 ‘무산(無酸)김’은 농산물로 치면 무농약 제품과 다름없다. 장흥군청 전희석 주무관은 “산을 안 뿌리니 갯벌도 건강해져 낙지를 비롯한 어패류 생산량도 꾸준히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관산읍 바닷가에 해발 107m 높이로 선 ‘정남진 전망대’는 꼭대기에 오르면 다도해의 수려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고흥군 거금도·연홍도부터 오른쪽으로 가면 완도군에 속하는 금당도·금이도·생일도·오력도 등 이름도 재미있는 섬들이 공기알처럼 앞바다에 펼쳐진다. 10층 전망대부터 내려오다 보면 층마다 문학영화관, 추억여행관, 북카페, 트릭아트 포토존 등 다양한 테마로 꾸며 시간 보내기 좋다.

■ 토요일에 만나는 ‘어머니 텃밭 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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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봄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는 시장으로 잡았다. 장흥 읍내를 휘돌아 나가는 탐진강변에 자리 잡은 ‘정남진토요시장’은 주 5일제 도입에 맞춰 관광객 수요 등이 늘 것을 예상해 2005년 개장했다. 전통시장치고 역사가 길지 않지만 사람 몰리는 이유가 있다. 처음엔 질 좋은 장흥 한우를 싸게 판매하는 직거래 상점 10여곳으로 시작했는데, 소고기 메뉴로 개발한 장흥 삼합이 인기를 끌면서 시장 규모가 커졌다. 지금도 군청에서 매달 한 번씩 유전자 검사를 할 정도로 한우 품질 관리에 신경을 쓴다.

장흥 삼합을 저렴하게 즐기려면 스무곳 넘는 시장의 한우판매점에서 취향에 따라 부위와 등급별로 소고기를 구입한 뒤 키조개와 표고버섯도 따로 구매해 인근 식당에서 상차림비를 내고 먹는 게 일반적이다.

협동조합 ‘장흥삶한우’ 김희창 대표는 “삼합용으론 기름기가 있는 고기가 어울린다”면서 차돌박이와 업진살, 살치살, 꽃등심 등을 추천했다. 장흥시장의 소고기 가격은 도시의 대형마트와 비교하면 평균 20~30%가량 저렴하다. 꼭 삼합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격표를 보면 구미가 동한다. 군청이 운영하는 시장 입구 특산품 판매장에선 장흥축협에서 만든 육포와 표고버섯, 무산김 등을 모아놓고 판매한다.

이름과 달리 토요시장은 상설시장이지만 토요일에만 들어서는 장이 하나 따로 있다. 시장 한쪽에 열리는 ‘어머니 텃밭 장터’다. ‘영암댁’ ‘목포댁’ ‘강진댁’ 등 저마다 택호를 써붙인 목걸이를 매고 시골마을 할머니들이 직접 캔 봄나물이나 농사지은 반찬거리를 판다. 군에서 교통비 1만~2만원씩 지급하는 덕에 30~40개 좌판이 매주 열리는데, 촌로들에겐 소일거리가 되고 시장엔 활력을 주는 일석이조의 흐뭇한 풍경이다.

장흥시장엔 여느 전통시장처럼 수십년씩 된 보리밥집, 곰탕집, 백반집 등 노포가 많은데,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식당이 하나 있다. 장흥에서 난 재료를 주로 쓰는 ‘로컬푸드 레스토랑’이다. 이름은 ‘짓다 부엌’. 궁중음식을 전공하고 파리의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에서 요리를 했던 윤지아 셰프(33)가 2015년 고향에 돌아와 차린 식당이다. 장흥산 표고에 저염 베이컨과 국내산 볶은 들깨로 고소한 풍미를 더한 크림파스타(2만원), 바삭하게 구운 빵 위에 장흥산 한우불고기와 참나물 무침을 얹은 타파스 요리(2만원) 등 재밌는 메뉴가 많다.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 오일도 일반 레스토랑에서 보기 힘든 고급제품을 쓴다. 군청 소유 공용건물이라 임대료가 싼 만큼 재료비를 후하게 쓴다는 설명이다. 식당은 테이블이 단 두 개뿐이다. 점심과 저녁 딱 8명씩만 식사할 수 있다. 전화(061-863-0888)로 예약하며 메뉴를 미리 고르면 차를 곁들인 1시간30분의 정찬을 즐길 수 있다.

장흥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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