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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갯벌의 숨소리 이정표가 되다…안면도에 딸린 섬 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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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박자박 소읍탐방]황도에서 쇠섬ㆍ대야도까지 태안 천수만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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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안면도 동쪽 천수만에 위치한 황도. 다리가 놓이고 그 아래 둑을 튼 이후 갯벌이 되살아나고 있다. 질펀한 갯벌과 대조적으로 바다 색깔이 유난히 푸르다. 태안=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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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속의 섬, 태안 안면도에 딸린 작은 섬 황도를 찾아갔다.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태안군 남면과 연결돼 있어 지명도 안면곶이었다. 조선 인조 때 태안 아전 방경장이 안면도와 남면 사이를 끊어 뱃길을 냈다. 1872년(고종 9년) 간행된 태안읍지(泰安邑誌)에 실린 내용이다. ‘백사수도’라 부르는 이 물길을 이용하면 홍주목(홍성)을 비롯한 천수만 동편에 소재한 군현에서 한양으로 가는 뱃길이 200여리 단축된다. 충청지역 세곡을 운송하는 것도 그만큼 쉬워진다.

◇섬 속의 섬 황도의 진짜 보물

안면도의 바깥 바다, 서해안은 단단한 모래가 넓은 백사장을 형성해 기지포, 꽃지 등 해수욕장이 발달했다. 반면 안면도 동쪽 천수만 해안은 모래사장 대신 질펀한 갯벌 층이다. 황도는 안면도와 다리 하나로 연결된 천수만의 섬이다. 섬 중간에 위치한 마을에서 10여분만 걸으면 어디든 닿을 만큼 작다. 섬의 농경지는 밭이 대부분이라 여름철이면 보리가 황금물결을 이뤄 ‘누런 섬’ 황도(黃島)로 불렸다. 사람이 정착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여서 ‘거친 섬’ 황도(荒島)라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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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보리 물결이 일렁이던 황도 들판은 요즘 푸릇푸릇한 마늘 밭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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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세운 이순신 동상이 남아 학교 터였음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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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한가운데 소공원은 2003년까지 창기초등학교 황도분교가 있던 자리다. 현재는 주차장과 쉼터로 조성해 학교의 흔적을 찾을 길 없는데, 공원 한쪽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남아 있다. 깔끔하게 페인트칠을 한 동상 받침에 ‘조국에 충성, 부모에 효도하고 황도를 더욱 사랑하는 어린이가 됩시다’라는 글귀와 함께, ‘원자실자(元字實字)’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1977년 박순배씨가 기증했다고 기록돼 있다. 정부의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시절이라 학교를 가꾸는 것도 결국 주민의 몫이었다. 안면도와도 분리된 섬이었으니 황도분교는 학생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도 함께 글을 깨치는 배움터였다.

마을 공원에서 들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섬 주민들이 가장 큰 자랑으로 내세우는 당집이 있다. 어두운 밤과 안개가 자욱한 날 바다에 나간 어민들은 이곳 ‘황도당산’에서 밝힌 불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신성한 장소로 여기는 이곳에 당집을 짓고, 해마다 정월 초이튿날과 사흗날 풍어제를 올렸다. 마을의 안녕과 만선 귀항을 바라는 ‘황도붕기풍어제’는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돼 있다. 197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후부터는 한층 유명해져 굿 구경을 하려는 관광객이 전국에서 몰린다.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 맨발로 작두를 타는 모습이 특히 볼 만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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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황도붕기풍어제’가 열리는 황도 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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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당집을 지키고 있는 수령 300년 회화나무. 아이들 불장난에 두 동강 났지만, 여름이면 여전히 넉넉한 그늘을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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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위험에 노출된 어민들로서는 안전을 보장하는 신이 많을수록 좋다고 여긴 걸까. 황도 당집은 애초 조선 중기 명장이자 어로의 신으로 추앙받는 임경업 장군을 모시다가 지금은 성주를 비롯해 ‘군왕장군’ ‘삼불’ ‘오방장군’ ‘사해용왕’ 등 불교와 민간신앙의 신들을 두루 봉안하고 있다. 담장으로 둘러진 당집 주변에는 커다란 회화나무 세 그루가 지키고 있다. 그중 한 그루는 성인 한 명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기둥이 두 동강 나 있다. 오래 전 마을 개구쟁이들이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구워 먹으려고 나무 밑동의 작은 구멍에 불을 피웠는데, 불길이 심재를 모두 태웠다고 한다. 껍데기만 남은 거목이 그래도 죽지 않고 해마다 풍성한 그늘을 만들어 여름이면 동네 주민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인다고 한다.

◇역간척으로 다시 살아난 갯벌

보리가 주를 이루던 황도의 들은 요즘 푸릇푸릇 마늘밭으로 변했다. 1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동네 주변에는 우후죽순으로 펜션이 들어섰다. 바깥에서 보는 풍경은 거친 섬이 아니라, 어엿한 관광지의 모습이다. “아주 베렸어. 대문도 울타리도 없이 살다가 지금은 다 잠가 놓고 살아.” 평생 황도에서 살아온 홍길용(83)씨는 전망 좋은 해안을 점령한 펜션 단지가 달갑지만은 않은 듯했다. 관광객이 남기고 간 쓰레기도 문제지만, 오ㆍ폐수로 바다가 오염될까 더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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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만에 물이 빠지면 황도 앞바다는 드넓은 갯벌로 변한다. 이 시간을 이용해 황도 어촌계에서 갯벌체험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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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갯벌체험으로 잡은 바지락. 뻘 흙은 갯벌에 골을 이루며 흐르는 바닷물에 깨끗이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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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의 주 수입원은 예나 지금이나 바다와 갯벌이다. 섬 주변 갯벌은 바지락, 모시조개 등 싱싱한 어패류를 무한정 토해 내는 저장고였다. 태안에서 황도로 시집 못 와 우는 처자들이 많았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1982년 섬과 안면도를 잇는 둑(연도교)이 놓여진 뒤 사정이 바뀌었다. 육지와 길을 잇기 위해 주민들이 피땀을 흘리며 돌을 굴리고 흙을 퍼 담아 쌓은 둑이 천수만 물목을 막아 탈이 생겼다. 조류가 바뀌고 모래가 쌓이면서 그 많던 조개와 물고기가 섬 주변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1년 지금의 연륙교가 생기고 황도는 다시 한번 반전을 맞는다. 다리 아래 둑을 트면서 물 흐름이 원활해지자 갯벌이 살아나고, 모시조개와 농어, 감성돔 등이 돌아왔다. 200m 남짓한 얕은 둑을 튼 것에 불과하지만 황도의 둑 철거는 서해안에서 ‘역간척’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열고 있다. 황도 위 서산B지구 방조제의 물길을 트자는 논의도 현재 진행되고 있다. 식량증산이 절대 선이었던 시대의 흐름도 환경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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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만 물이 빠지면 황도 주변으로 드넓게 갯벌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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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부모와 함께 온 아이가 갈퀴로 갯벌을 긁고 있다. 갯벌체험은 실제로 아이보다 어른들이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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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앞바다 갯벌체험. 천수만 바닷물의 절반은 빠져 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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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갯벌은 여행객에게는 즐거운 체험, 마을 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수입원이 되고 있다. 황도 앞바다는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빠지면 드넓은 갯벌로 변한다. 포구 앞 모래톱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 바다가 진한 회색 개펄로 변한다. 순식간에 천수만 바닷물의 절반은 빠져 나가는 것 같다. 물 빠짐과 동시에 황도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갯벌체험이 시작된다.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 주겠다는 목적으로 오는 가족 여행객이 많지만, 실제 갯벌에 들어가면 부모의 욕심이 앞선다. 장화와 갈퀴, 바구니(3kg들이) 대여료는 성인 1만원, 최대 6시간 동안 조개를 캘 수 있으니 요령만 좋으면 한 바구니 채우는 게 어렵지 않다. 요즘은 바지락이 주로 잡힌다. 일부 펜션에서 간조 시간이 밤이면 야간에 어패류를 잡는 ‘해루질’도 운영한다.

◇천상병 시인 옛집이 천수만에?

천수만 주변 안면도에는 황도 외에도 여러 섬이 있었지만, 소규모 방조제로 연결돼 지금은 섬이라 인지하기 어렵다. 황도 바로 아래 쇠섬은 ‘인생사진’ 여행지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작은 섬 전체가 명아주과의 한해살이 풀인 ‘나문재’라는 이름의 펜션 단지로 개발돼 있다. 숙박할 게 아니면 일부러 가기가 주저되는데,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심적 부담을 덜었다. 천수만이 내려다보이는 카페 주변뿐만 아니라 섬 전체를 아기자기한 정원으로 꾸몄다. 숙소와 바다를 연결하는 오솔길을 거닐어도 좋다. 카페 음료는 6,000~9,000원, 간단한 식사는 1만4,000원으로 비싼 편이다. 입장료가 포함된 셈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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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문재 카페 앞 정원에서 여행객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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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섬 전체가 휴양단지로 조성돼 있다. 정원과 바다를 거닐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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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만 물이 빠지면 안면암 앞바다의 섬까지 걸어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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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곳에 펜션만 있는 게 아니다. 쇠섬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천수만이 코앞에 보이는 언덕에 ‘안면암’이라는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 생긴 절이어서 역사를 따질 것까지 없고 다분히 관광객을 위한 절이다. 사찰에서 약 400m 떨어진 천수만의 두 개 무인도 사이에 탑을 세워 놓아, 물이 빠지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서 천수만 끄트머리까지 한참을 내려오면 대야도 마을이다. 다섯 개 섬이 육지가 된 지형이라지만, 지명에만 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다낚시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곳인데, 이 마을에 천상병(1930~1993) 시인의 옛집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시인의 섬’ 펜션으로 들어가는 길 초입에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벽이 그대로 드러난 허름한 집이 한 채 있다. 주변에 이국적인 외관을 자랑하는 펜션이 수두룩해 한편으로 짠한 마음이 든다. 세 칸짜리 집 방 한 칸에는 시인의 사진과 대소쿠리가 놓여 있다. 마당의 장독대도 옛집의 사진을 보고 재현했다. 원래 천상병의 집이 있던 곳은 의정부(현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자락이었다. 1972년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 여사와 결혼한 후 차린 살림집이 일대 정비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생전에 시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모종인씨가 2005년 자신의 고향인 이곳으로 옮겼다. 시인의 집이 없어지면 시인의 영혼도 없어질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에 지붕과 문짝을 그대로 가져왔다. 천상병 옛집은 솔숲에 아늑하게 자리 잡아 언뜻 수락산 자락 같으면서도 바다가 보이는 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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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도 선착장에 낚싯배들이 정박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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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섬 펜션과 천상병 옛집 알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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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락산 자락 천상병의 집을 그대로 옮겨 지은 천상병 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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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 옛집 내부. 그의 사진과 대표작 ‘귀천’ 액자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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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바로 앞에 전시실을 꾸미는 등 안면도 천수만 바닷가에 시인의 영혼을 심으려던 모종인씨의 꿈은 그러나 미완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 2011년 암을 이기지 못하고 모씨도 50대의 나이에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천상병의 시 ‘귀천(歸天)’에 빗대면 너무 짧았던 그의 소풍이 또 안타깝다. 현재 그의 부인 이숙경씨가 펜션을 운영하며 천상병 옛집과 전시실을 관리하고 있다. 대야도에서 큰 도로로 나오는 길목, 지포저수지 부근에는 미로공원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헤매지 않고 제대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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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포저수지 인근 안면도 미로공원. 가운데는 황금색 측백나무로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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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글ㆍ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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