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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철책이 눈처럼 녹았다, 예술이 된 DM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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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 화두가 된 ‘분단’

일본 도쿄 ‘자연국가’전 재일작가

‘꿈의 정원’ 실현 과정 선보이고

서울역 284공간 전시장은

철원 DMZ 프로젝트로 꾸며져

남북 가로막던 철조망 녹여 낸

디딤판·철탑·종탑으로 관객 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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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무장지대(DMZ)는 호랑이 농장이 되어야 해!’

비디오아트를 창시한 거장 백남준(1932~2006)은 1988년 11월 파격적 제안을 전세계로 발신했다. 미국 뉴욕의 ‘프로젝트 디엠지(DMZ)’ 기획전에 내놓은 컬러인쇄 복사지 글씨작품을 통해서였다. 전시를 짠 재미도시학자 박경씨가 ‘한국 디엠지를 점령한다면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 상상해달라’며 부탁해 내놓은 출품작이었는데, 내용이 재기발랄했다. 백남준은 프린트된 티브이 스크린의 빈 윤곽 위에 색색의 크레용으로 손글씨를 휘갈기며 디엠지가 호랑이 농장이 되어야할 세가지 이유를 적었다. ‘첫째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둘째 생태 낙원을 유지하기 위해, 세째 침입자를 먹어치우기 위해.’

망상이나 치기어린 장난처럼 비쳐졌던 30년전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더이상 꿈만은 아니다. 이제 어엿한 한국미술의 중요한 트렌드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비롯된 남북간 정상회담과 화해 바람에 힘입어 비무장지대 감시초소가 해체되면서, 철조망과 잔해들을 주된 소재로 한 설치미술품이 제작되고, 분단미술 자체를 한국미술의 새로운 힘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들이 진행중이다.

이런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 지난 13일부터 일본 도쿄 시내 남쪽의 하라미술관에서 시작된 ‘자연국가’전(7월28일까지)과 지난달부터 옛 서울역사를 개조한 복합문화공간 서울역 284에서 시작된 ‘DMZ’전(5월6일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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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작가 최재은씨가 주도한 하라미술관의 ‘자연국가’ 전은 내력과 틀거지가 충실하다. 5년 전부터 비무장지대에 공중보행로와 생태정원을 예술의 힘으로 짓는다는 의도아래 국내외 대가들과 추진해온 최 작가의 ‘꿈의 정원’프로젝트가 하나씩 실현되는 과정과 성과들을 차곡차곡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저녁 도쿄 시내 남부 시나가와 부근에 자리한 미술관 1층의 개막행사에서 선보인 그의 신작 설치작품 ‘증오는 눈처럼 녹는다’는 관객들의 눈길을 가장 오랫동안 붙든 화제작이었다. 철거된 비무장지대(DMZ)의 철조망을 녹여서 관객이 징검다리나 디딤판처럼 밟고 다닐 수 있도록 휘어진 일렬로 늘어놓은 것이 작품 얼개였다. 단순해 보이지만, 철조망을 용광로에 녹여 그 날카로운 촉감을 얽고 생채기 난 철판의 질감으로 바꿔냈다는 부분이 시각적으로 도드라졌다. 2년전 서울에서 프로젝트 설명회를 할 때 남북정세가 험악해서 대부분 희망사항만을 이야기하는데 그쳤던 분위기였음을 감안하면, 이날 선보인 전시들은 불과 2년 사이 작업 여건이 급속도로 좋아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현장서 만난 최 작가는 “거의 삭아 문드러진 철조망을 녹이면서 나온 철판 표면에서 분단으로 상처입은 마음, 거친 상념을 읽었다”고 했다. 미래 평화가 찾아온 비무장지대에 들어설 찻집을 떠올리며 그렸다는 이우환 작가의 신작 드로잉 <투명 다정>과 철원 등지의 옛 땅굴에 구상중인 종자 지식은행의 구상을 담은 조민석 건축가의 디엠지 저장소 모형 등이 이어졌고, 김태동 사진가가 휴전선 접경지대의 새벽 하늘을 찍은 연작들과 최 작가가 거울판 위 비무장지대 식물수종의 명판을 놓은 작업들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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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284공간의 전시는 거대 목표를 좇는 차림은 아니다. 2012년부터 김선정 기획자가 철원 일대에서 진행해온 디엠지 프로젝트의 여러 결과물들과 최근 주요작가들의 분단 관련 신작들을 옛 역사공간 여기저기에서 디엠지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영역들을 통해 나누어 보여주고 있다. 디엠지 철조망을 녹여 만든 종을 매달고 종탑을 설치한 안규철 작가의 작업이 들머리에서 관객을 맞으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도쿄에서도 선보은 최 작가의 철조망 철판 작업이 역 공간 사이 문지방에 디딤판으로 걸려 또다른 느낌을 낳았다. 비무장지대안 정착촌 역사를 초현실적 시점으로 담은 전준호 문경원 작가의 설치영상작업<프리덤 빌리지>는 옛 귀빈실 공간에 철거된 비무장지대 초소의 잔해물들 위에 놓여 기묘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2층에선 손장섭, 민정기, 이해반 작가 등이 분단된 디엠지의 현장을 사생하고 그린 그림들이 전면에 내걸렸다. 여러 영역에서 분단과 디엠지의 현장성을 담은 다양한 작업들을 일괄해 보여주는데, 전시 구성의 밀도나 메시지는 미약하고 산만해 보인다. 주목되는 건 다음달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 출품하는 스타작가 이불씨의 행보다. 그는 서울역 284에 디엠지 초소의 철조망을 녹인 큰 철탑 출품작 모형을 미리 선보이는 중인데, 비엔날레 수상 여부가 화제가 될 만큼 눈길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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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엠지 잔해를 갖고 경쟁하듯 현대미술품 작품을 만들어내는 최근 트렌드가 일종의 쏠림현상처럼 비춰진다거나 시각적 오리엔탈리즘에만 편승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선도 없지 않다. 시각문화의 맥락에서 얼마나 다양한 층위의 담론과 이야기들을 펼쳐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작가들이 그만큼 준비와 내공을 갖췄는지는 전시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하라미술관에서 만난 이불 작가에게 베네치아 출품작과 분단미술의 관계에 대해 묻자 그는 잘라 말했다. “디엠지, 철조망? 그저 내 작품 재료일 뿐입니다.” 도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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