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한루원은 천상의 세계를 지상에 구현한 조선시대 대표 관아 정원이다. 밤이 되면 연못 주변 조명이 불을 밝혀 운치를 더한다. 남원=최흥수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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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가 먼저일까, 춘향전이 먼저일까. 특정 이미지가 굳어지면 본질이 가려진다. 이럴 때 유명세는 복이 아니라 독이다. 남원 광한루원이 그렇다. 성춘향과 이몽룡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의 무대로 각인돼 그 본질적 아름다움과 가치가 다소 뒷전으로 밀렸다. 소설을 읽지 않아도 전 국민이 다 아는 내용인지라 광한루는 마치 춘향전 때문에 존재하는 누각으로 인식된다. 요즘으로 치면 인기 드라마 세트쯤으로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는 말이다. 춘향전을 살짝 가리면 광한루원과 남원이 달리 보인다.
◇춘향전 이전에 광한루, 600년 관아 정원의 품격
광한루는 경치 좋은 강 언덕에 위치한 게 아니다. 주차장에 도착하면 누각은 담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정식 이름도 ‘광한루원((廣寒樓苑)’이다. 광한루를 중심에 두고 설계한 정원이라는 뜻이다. 광한루원은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지상에 구현하고자 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관아 정원이다. 청허부(淸虛府)라는 현판이 걸린 정문을 통과하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것 같은 푸른 정원이 펼쳐진다. 초입에 조선 명종 때 심었다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깊고 푸른 연못 주위에 버드나무 군락이 운치 있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야간 경관조명으로 화려하게 물든 광한루원. 화려함이 지나쳐 야단스럽게 보일 정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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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 주변 연못에 비단잉어가 헤엄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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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잉어가 헤엄치는 연못에는 영주(한라산), 봉래(금강산), 방장(지리산) 등 삼신산이 조성돼 있다. 세 개의 작은 봉우리는 각각 다리로 연결돼 있다. 봉래, 방장 두 섬에는 대나무와 배롱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작은 정자를 지어 신선의 휴식처로 삼았다. 연못을 가로질러 광한루에 이르는 다리는 은하수를 건너는 오작교다. 칠월칠석 1년에 단 하루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천상의 사랑 이야기는 춘향전 이전부터 있었다. 광한루원은 밤이 더 화려하다. 연못 주변으로 형형색색 조명이 불을 밝힌다. 천상의 별이 지상에 내려앉은 듯, 나무와 누각을 비추는 조명이 수면에 일렁이는 모습이 또 하나의 은하수다. 은은함보다 화려함에 가까워 보기에 따라서는 과하다 여겨질 정도다.
광한루 건물은 1419년 조선 세종 때 황희가 처음 세웠으니 올해로 600년이 됐다. 평양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조선의 4대 누각으로 꼽힌다. 일부는 영남루 대신 경복궁 경회루를 치기도 하는데, 경회루가 궁궐의 누각임을 감안하면 비교 대상은 아닌 듯하다. 원래 이름은 광통루(廣通樓)였는데, 세종 16년(1434)에 남원부사 민여공이 증축했고 1444년 전라관찰사 정인지가 광한루라 고쳐 불렀다. 수려한 경치가 전설상의 달나라 궁궐인 ‘광한청허부’와 닮았다는 뜻에서다. 광한루 내부 정면에도 ‘계관(桂觀)’이라는 대형 편액이 걸려 있다. 달나라 계수나무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라는 의미겠다. 광한루에는 이 외에도 김종직, 정철, 정인지, 강희맹, 백광훈, 이경여 등의 시가 걸려 있는데, 누각 자체가 문화재(보물 제281호)로 지정돼 있어서 올라가 볼 수는 없는 형편이다. 단 매년 5월 열리는 ‘춘향제’ 축제 기간에 한정된 인원에게만 입장을 허용한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누각은 인조 4년(1626)에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버드나무가 군락이 가지를 드리운 광한루원 삼신산 주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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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 내부에 ‘계관(桂觀)’이라 쓴 대형 편액이 걸려 있다. 춘향제가 열리는 기간 한정된 인원만 입장이 허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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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에서 여행객이 한복 차림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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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10~28년에는 광한루를 법원으로, 누각 마루 아래는 감옥으로 사용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지역의 상징적 건물을 식민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면서도 차마 부수지는 못했던 듯하다.
광한루는 지방관리들의 놀이터로 이용된 것만은 아니다. 광한루 앞 삼신산을 품은 연못은 선조 때 전라도관찰사 정철이 광한루원 앞을 흐르는 요천(여뀌가 많은 하천이라는 의미다)의 물을 끌어 들여 조성했다. 따라서 고여 있는 게 아니라 늘 맑은 물로 채워진다. 연못을 거친 물은 광한루원 서편 가방뜰로 흘려 보내 농업용수로 이용했다. 관아와 가까워 불이 나면 소방수로 이용할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춘향전의 변 사또처럼 자신의 욕심만 차린 게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마음까지 담은 셈이다.
춘향사당 현판 아래에 거북 등에 올라탄 토끼 조각이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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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에 춘향전과 관련한 시설이 들어선 것은 1920년 무렵으로 채 100년에 지나지 않는다. 광한루 뒤편 춘향사당은 1931년 남원의 기생과 유지들이 돈을 모아 만들었다. 춘향의 정절과 독립 의지를 담았다 한다. 사당에는 춘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를 올리는데, 제관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춘향열녀사(春香 女社)’라는 현판 아래는 거북 등에 올라탄 토끼 조각이 있어 별주부전의 한 대목을 연상케 한다.
◇춘향의 절개와 비교되는 남자의 지조, 만복사 양생
광한루원 북문을 나서면 ‘남원예촌’이다. 한옥호텔 주변으로 오래된 한옥 건물이 포진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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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춘향에 선발된 여성들이 남원예촌 거리를 걷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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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예촌 거리의 이몽룡과 성춘향 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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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호텔 맞은편에는 ‘조갑녀 살풀이 명무관’이 자리 잡고 있다. 조갑녀(1923~2015)는 수건을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풀어내는 민살풀이춤의 대가다. 전시관에 그의 춤사위를 기록한 사진과 영상을 전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본정통이었던 도로를 조금만 오르면 ‘남원성 남문지’ 표석이 나온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린 돌하르방 같은 형태가 특이하다. 가까운 곳에 ‘남원부 관아터’ 표석도, 용성초등학교에는 남원부 객사였던 용성관의 석물이 학교 본관 계단석으로 활용되고 있다. 학교 정문과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사거리 귀퉁이에 복원한 ‘남원석돈’은 남원성의 흔적을 그나마 가장 온전히 간직한 유물이다. 석돈(石墩)은 남원성의 수호신을 섬기는 제단으로 원래 용성관 뒤편에 거대한 돌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뒷날 이 돌을 빼내 여러 관공서를 지으면서 사라진 것을 지금의 자리에 복원했다.
남원성남문지 표석. 무슨 형상인지 의아한데, 만복사 터에 가면 의문이 풀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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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초등학교 본관 계단의 석물. 남원관아 객사인 용성관 석재의 일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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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남원역의 조형물. 주변에 문화재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방치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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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남원역 급수탑 주변으로 문화재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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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외곽에 고속철도가 정차하는 남원역이 신설되면서 옛 남원역도 구시대의 유물로 남았다. 열차가 다니지 않는 선로 주변에 꽃밭을 조성하고 사진 찍기 좋은 조형물을 세우는 등 나름 애쓴 흔적이 있지만,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듯 낡고 색이 바래 가 보라고 권하기가 다소 민망한 상태다. 이곳은 남원성 북문이 있던 곳으로, 현재 문화재 발굴조사로 주변이 파헤쳐져 있어 더욱 어수선하다.
남원을 변하지 않는 사랑의 고장이라 한다면 그 유래는 광한루가 아니라 만복사다. 조선 전기 김시습의 소설집 ‘금오신화’에 수록된 한문소설 ‘만복사저포기’에 나오는 그 절이다. 광한루원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만복사지(萬福寺址)가 남아 있다.
만복사지의 석인상.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지만 투박한 조각이 인상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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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표정이라 설명하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언뜻 씁쓸한 미소도 스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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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이 여성의 절개를 아름답게 포장한 소설이라면, 만복사저포기는 지고지순한 남성의 지조를 담고 있다. 남원에 사는 총각 양생(梁生)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의 구석방에서 외로이 지내다 부처와 저포(樗蒲) 놀이를 해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처녀를 얻었다. 처녀는 왜구의 난 중에 부모와 이별하고 3년간 궁벽한 곳에 묻혀 있다가 배필을 구하던 터였다. 둘은 부부관계를 맺고 며칠간 열렬한 사랑을 나눈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양생은 약속한 장소에서 여인을 기다리다 딸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났다. 여기서 양생은 사랑을 나눈 여인이 3년 전에 죽은 혼령임을 알게 된다. 여자는 양생과 부모가 베푼 음식을 먹고 나서 저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사라졌다. 낙담한 양생은 그 여인을 그리워하며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 만복사저포기는 춘향전과 달리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 못한다.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만복사터 5층 석탑과 옥개석 잔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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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 석불입상. 뒷면에도 불상이 조각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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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 때 세운 만복사는 정유재란 때인 1597년 불타 없어졌다. 절터에는 현재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오층석탑과 석좌, 당간지주, 석불입상 등이 남아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지만 만복사 터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유물은 투박한 석인상(石人像)이다. 당간지주 옆 도로변에 있던 것을 절터 어귀로 옮겨 놓았다. 도대체 무슨 형상일까 궁금했던 남원성 남문지와 서문지 표석의 비밀이 비로소 풀렸다. 바로 만복사 석인상을 본뜬 것이었다. 석인상 안내판에는 ‘눈 부위를 심하게 돌출시켜 분노의 모습을 띠고 있다’고 적었는데, 보기 나름이다. 눈을 부라린 모습이 험상궂게 보이기도 하지만, 바로 아래서 보면 언뜻 씁쓸하고 허탈한 미소도 스친다. 한순간의 꿈같은 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간 양생의 표정일지도 모르겠다.
◇남원 여행 정보
광한루원 앞 요천을 건너는 승월교 위의 장식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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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월교를 지나면 승월폭포가 나타난다. 폭포 뒤편으로 통로가 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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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글ㆍ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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