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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삶도] 스물셋 이광재에게 노무현이 말했다 “역사 발전의 도구로 써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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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32>노무현의 평생동지 이광재

10년 전 수감 중 노 전 대통령 서거 비보 들어

“그분과 함께 한 시간은 인생의 꿈 같은 나날”

“정치할 생각? 3ㆍ1절 특사 제외 소식에 기뻐해”
한국일보

생전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과 이광재 원장의 얼굴을 팝아트 기법으로 표현해 하나로 만들었다. 이 원장은 “비서는 얼굴이 없어야 한다”며 늘 노 전 대통령의 뒤에 섰다. 그는 “그러다 보니 함께 제대로 찍은 사진이 없더라”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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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첫 동지’ 이광재(54) 여시재 원장은 시종 반복했다. “정말 미스터리해요.”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봐도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인연이란 것이다.

첫 만남부터 그랬다. 정치에 막 발을 디딘 마흔 둘의 노무현 국회의원 당선자는, 감옥에서 나온 스물 셋의 이광재에게 부탁했다. “나는 정치를 잘 모릅니다. 나를 역사발전의 도구로 써줘요.” 그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였다. 그 말에 “그러겠다”고 답한 이 청년의 배포도 대단하다. “이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정치를 사회 변화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는구나 싶었죠. 그래서 믿음이 생긴 거예요.”

게다가 노무현은 그를 비서가 아니라 보좌관으로 썼다. 심지어 자신이 비서 한 명을 추천한 것 말고는 보좌진 구성의 전권을 그에게 줬다. ‘나는 당신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신호였다. 나이 스물 셋의 보좌관은 지금까지도 국회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두 번째 미스터리는 이광재에게서 비롯된다. 1992년 총선(부산 동)에서 떨어진 노무현을 두고 그는 결심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야겠다.” 의정활동 4년을 함께 하며 생긴 믿음이, 인생을 ‘노무현 대통령’에 걸도록 이끈 것이다. 심지어 95년 지방선거(부산시장), 이어 96년 총선(서울 종로)에서 연달아 낙선하고 “너무 힘들다, 이제 정치 그만 할란다”고 할 때도 그는 노무현을 도망 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그리곤 결심을 한 지 10년 만에 ‘노무현 대통령’의 꿈을 이뤘다.

내리막은, 그로부터 시작이었다. 언론과 검찰은 ‘실세 중의 실세’, ‘노무현의 오른팔’이라는 그를 겨눴다. 여당에서조차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사람”이라는 비난이 나왔다. 화살은 결국 그를 넘어 퇴임 뒤의 노무현에게로 갔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도,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는 걸 견딜 수 없던 노무현은 스스로 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옥중에 있던 이광재는, 서거 닷새째가 돼서야 한시 석방돼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동지에게 향할 수 있었다. 2009년 5월 27일, 붉어진 눈시울로 서울 구로구 영등포구치소를 나서며 흐느끼던 이광재를 기억한다. “너무 불쌍해요, 너무…”

이런 미스터리한 인연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충분히 누리지는 못했으나 삶의 화양연화(花樣 華)를 함께 만든 벗이자 동지가 있다는 건 그래도 축복 아니었을까. 객관적이라서 잔인한 평가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관객으로서 드는 셋째 미스터리는 이것이다. 인생을 대하는 노무현ㆍ이광재의 자세가 같더라는 사실. 각각 사십 대와 이십 대에 만났지만, 두 사람의 꿈은 ‘사람 사는 세상’(노무현), ‘그래도 노력하면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세상’(이광재)이었으니 말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앞둔 14일 ‘시대와 함께 하는 집’이란 뜻의 민간 싱크탱크 여시재 사무실에서 이광재 원장을 만났다. 서울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북악산 자락, 나뭇잎에 바람 이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새벽 4시 기상해 책 읽고 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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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영원한 동지’ 이광재 전 강원지사를 14일 서울 종로구 북악산 자락에 있는 여시재에서 만났다. 고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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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좋아하시죠, 요즘도 다니나요?

“매일 하죠. 등산이라기보다 산책인데, 1시간 20분 정도 북한산에 다녀와요.”

-그럼 몇 시에 일어나나요?

“새벽 3시 반에서 4시 사이에요. 일어나면 먼저 책을 봐요. 1시간 반 정도 책을 보고 좀 눈을 붙였다가 산에 다녀오죠.”

그의 ‘산 사랑’은 유명하다. 의원 시절 지방으로 워크숍을 가 새벽 2시까지 기자들과 술자리를 하고도 2시간 뒤면 일어나 산에 올랐다.

-산을 왜 그렇게 좋아하나요?

“자연이 주는 힘이 있어요. 매일 같은 길을 걷거든요. 그런데 달라요. 봄이면 봄대로 꽃이 피는 날, 비가 와서 꽃이 떨어 지는 날, 신록이 생기는 날… 매일 달라요. 그래서 짜릿하죠. 나도 매일 새로워질 수 있다는 걸 느껴요. 또 세상은 나와 너무 다르다는 것, 그 다른 세상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거냐, 이런 생각도 하고요.”

-어릴 때는 꿈이 뭐였나요?

“내 인생에서 결정적인 경험을 하면서 생각을 한 게 있죠. 초등학교 1학년 때였거든요.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누나하고 동네 부잣집에 TV를 보러 갔죠. 그런데 그 집에서 우리를 내쫓아서 울며불며 집에 온 일이 있어요. 그 뒤에 아버지가 화도 나고 속도 상하고 해서 결국 TV를 샀어요. 그 부잣집은 닫아 두고 봤지만, 우리는 마루에 TV를 설치하고 마당에 멍석을 깔아두고 감자, 옥수수를 삶아 먹으며 동네 사람들과 함께 봤죠. ‘여로’라는 드라마를 하던 때죠. 그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왜 누구는 가난하게, 누구는 부자로 사는 걸까’, ‘사람은 노력을 하면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불과 일곱 살 때인데, 생각이 정말 깊었네요.

“그러다가 중2 때 원주로 갔어요. 아버지가 평창 시골에 있어봐야 아무것도 안 된다며 유학을 보내신 거죠. 봉산동 철길 옆에서 자취를 했어요. 하루는 집에 가는데, 기차가 좌악 오니까 그 전엔 보이지 않던 하루살이들이 기차의 불빛으로 몰려들더라고요. 그때 ‘내 인생도 하루살이 같은 거 아닐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인데, 불빛이 비치면 달려드는 하루살이 같은 거 아닐까’ 한 거죠. ‘탈무드’나 나세르(이집트 정치가), 케말 파샤(터키의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의 전기를 읽던 때였어요. 그래서 그때 결심했죠. ‘하루살이가 아니라 일가를 이루며 살자’고.”

그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해는 5ㆍ18이 일어난 80년이었다. 청소년기의 그에게 공포와 분노가 혼재했지만, 그는 ‘데모를 하면 집안이 뭐가 될까’라는 책임감이 앞섰다. 그는 1남 6녀 집안의 장남이었다.

“수학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인문계에 진학하면 데모를 하게 될 거 같았어요. 기계가 작동하는 원리에 관심이 많고, 수학을 좋아하기도 해서 화학공학과(연세대)에 들어갔죠.”

-대학 시절은 어땠나요?

“시대의 부채의식이 없어질 순 없었죠. 그래서 로타렉트라고 로터리클럽의 대학생 지부 서클에 들어갔어요. 농촌 봉사활동이나 야학을 했거든요. 창신동에서 야학교사 생활을 했죠.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청계천 피복노동자들을 가르쳤어요. 데모는 못 하지만 그거라도 하면서 자기 운명을 바꿔보려는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한양로터리클럽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죠. 당시 회장이 김광균 시인이었고, 부회장이 윤승두 당시 한국은행 부총재였죠. 김인득 벽산그룹 회장도 멤버였고요. 그들이 매주 월요일 호텔에 모여서 공부를 했어요. 휴대폰이 없을 때니까 ‘전화 왔습니다’ 연락도 전하고, 강의록도 만들었죠. 그때 대한민국의 부자들은 어떻게 사는가를 배웠어요. ‘부지런하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 메모하는 습관이 배어있다’는 게 그들의 특징이었죠.”

-하지만 결국 학생운동을 하게 됐잖아요?

“그런데 시대 상황이 그렇게 녹록지 않더군요. 데모를 피해나가는 게 심리적으로 쉽지 않았어요. 하루는 학교에서 시위가 있었는데 나는 도서관에 있었죠. 사복경찰들이 밀려 들어와서 애들을 때리고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가는 난장판을 보면서 내가 가만히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었고 학생운동을 하게 됐어요.”

그는 당시 학생운동 연합기관지였던 ‘백만학도’의 편집장을 맡았다. 당시를 떠올리며 그는 “후배들에게 참 엄격한 선배였다”고 돌이켰다. “나라를 바꾸자고 인생을 걸며 하는 건데 진지하고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백만학도’는 어떤 기관지였나요?

“일종의 ‘학생운동 지침’을 만드는 거죠. 우리 학생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최초로 전국에 뿌려지는 거였으니 상당량을 인쇄했어요. 그러면서 나도 점점 ‘언더’로 가게 됐죠. 학생운동 지도부는 ‘오픈 지도부’와 ‘언더 지도부’가 있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더 위험해진 거죠.”

그의 학생운동 시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바로 ‘단지(斷指)’다. 그는 오른쪽 검지 손가락의 한 마디가 없다. 국회의원이 됐을 때 상대 진영에서 ‘병역 기피용 아니었느냐’고 공격하는 빌미가 됐다. 손가락 때문에 그는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그는 17대 총선 출마 전 펴낸 자서전 성격의 책 ‘우통수의 꿈’에서 “(86년) 태극기 하나를 샀다.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절대 변절하지 않는다’고 혈서를 썼다”고 밝혔다. 당시 일을 물으니, 그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단지 때문에 곤욕을 치렀죠. 왜 손가락을 자르기까지 했나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마음이 심약해서 그랬던 거죠. 마음이 단단하지 못 해서… 부끄러운 일이죠.”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시로 봐서는 내가 선택할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이 들어 돌아보면 꼭 그랬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결국 수배 대상이 된 그는 충남 천안의 막노동 현장과 부산의 주물공장 등에서 일하며 수사기관의 눈을 피해 다녔다. 그때 처음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만났다. 여럿이 모인 자리라 의미 있는 만남은 아니었다고 그는 기억했다.

“성당이었던 것 같아요. 부산의 재야 인사들이 모인 시국강연회였을 거예요. 그저 인사를 나눈 정도였죠.”

이후 결국 부산에서 그는 붙잡혀 보안사로 끌려갔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한 달 가까이 조사를 받고 구속, 수감됐다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풀려났다.

◇노무현의 첫인상 ‘국회의원이 목적이 아닌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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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재 원장은 스물세 살부터 21년 간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했다. 노 전 대통령과 인생의 가장 정점에도 올랐고, 시련도 겪었다. 노 전 대통령의 생전 음성을 마치 어제 들은 듯 생생하게 읊는 표정이 마치 아이 같았다. 고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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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4월 다시 노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됐죠?

“감옥에서 나왔는데, 부산의 강은교 시인 남편인 (재야운동가) 임정남씨가 당시 총선에 당선된 노무현 의원에게 저를 추천했어요. 그 전 감옥에서 87년 6월항쟁과 그 해 대선에서 양김(김영삼ㆍ김대중)이 분열하는 걸 보면서 우리가 변화는 결국 의회민주주의에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는데 그러던 차 13대 국회의원 당선인이었던 노 대통령을 만나게 된 거죠.”

-서울 코리아나호텔 2층에서지요?

“(웃음) 맞아요. 그때 깜짝 놀랐어요. 우리 아버지가 1941년생, 노 대통령은 1946년생이거든요. 그러니 아버지와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노 대통령이 그때 저를 보고는 ‘나는 정치를 잘 모른다, 나를 역사 발전의 도구로 써달라’고 얘기했어요.”

-처음 보고서요?

“그때 사실상 처음 본 거죠.”

-노 전 대통령이 당시 이광재가 어떤 사람인지 사전에 정보를 조사하고 온 걸까요?

“그것까진 모르지만, 제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정보랄 게 있었겠어요? 하하”

-그런데 뭘 보고 그렇게 말한 걸까요?

“모르겠어요. 미스터리한 일이에요.”

-그런 부탁을 듣고 뭐라고 했나요?

“그러겠다고 했죠.”

-그 말에 덜컥 알겠다고 받아들인 것도 신기하네요.

“그 말이 너무 인상적이었거든요. 국회의원이 되는 게, 대통령이 되는 게 목적인 정치인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게 목적이 아니라 사회 변화에 기여하는 데 국회의원이라는 자리를 (도구로) 생각하는 거라는 믿음이 생겼죠. 비서 한 명만 본인이 추천하고 나머지 (의원실) 보좌진을 구성하는 전권을 저에게 줬어요. 스물세 살짜리한테.”

학생운동만 했던 청년이 인맥이랄 게 있었겠나. 선ㆍ후배들로 보좌진을 꾸렸다. 그때 운전 비서로 추천했던 최영씨는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고 나서도, 퇴임 후에도, 차를 몰았다. 노 전 대통령이 세상과 작별하는 영구차의 운전대도 최씨가 잡았다. 지금도 봉하마을에서 권양숙 여사의 곁을 지킨다.

“다 학생운동 했던 사람들이 뭘 알겠어요? 대신 사람을 많이 썼어요. 월급을 N분의 1로 나누고요. 신촌에 여관방을 잡아놓고 매일 함께 공부했죠. 첫 해에 어쨌든 ‘5공 청문회’에 대정부질문까지 잘 치렀어요.”

-5공 청문회에서 노 전 대통령의 활약은 대단했죠.

“청문회를 준비하는 대통령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우리(보좌진)가 자료 준비를 아주 많이 했어요. 그럼, 점검을 할 때 대통령이 전지를 가져오라고 해요. 그리곤 하나하나 묻는 거예요. ‘A라는 사람이 이 질문에 그가 B라고 답하면 근거는 뭐냐, 또 C라고 할 때는?’ 이런 식으로 경우의 수를 나뭇가지 그리듯이 쳐 나가요. 한참 들여다 본 뒤에 이걸 싹 없애요. 그리고는 A4용지에 다시 좍 정리를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확실히 천재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또 인상적인 기억이 있나요?

“세비 항목 중에 입법활동보조비로 나오는 돈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우리를 주더라고요. ‘내가 입법활동을 하는 게 아니고 자네들이 하는 거니까’라면서. 그런 면이 우리를 참 감동시켰죠. 또 제게는 ‘너는 새벽에 일찍 나와라’ 하시더니 매일 헌법, 국회법을 가르치셨죠. ‘국회에 들어왔으면 법을 알아야 한다, 리걸 마인드(legal mind)가 없으면 절대 국회라는 장에서 일하지 못한다’고요.”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이 원장은 노 전 대통령의 음성을 따라 했다. “수치, 법률, 디테일에 강해야 되는 거야. (인권변호사 할 때) 학생운동 한 애들이 나한테 ‘사회주의 교과서’를 갖고 오더라고. 그래서 열심히 읽어봤지만 나는 그 생각에 절대 동의할 수 없어.”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이 두 가지 예를 들었다고 한다.

“내가 셋방에 살다가 집을 사서 이사를 가게 됐는데 딸 아이 인형이 너무 낡아서 버리고 왔어. 그랬더니 딸이 그 인형 내놓으라고 울어서 난리가 난 거야. 다 망가졌으니 새 거 사준다고 해도 안 되더라고. 하는 수 없이 비가 쏟아지는데 다시 살던 집에 가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낡은 인형을 찾아 왔지. 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서로 귀하다고 생각하는 게 다를 수 있다는 거. 그래서 인생은 상대적인 거지. 사회주의라는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다는 뜻이야. 또 한 번은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속으로 ‘어쩌나’ 했는데 지하철 내리니 이미 우산장수가 나와 있어. 자본주의의 힘과 동력을 우습게 봐선 안 되는 거야. 그러니 사회주의 이론은 택도 없는 소리지.”

◇92년의 결심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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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국회의원의 보좌관 시절의 이광재 원장. 20대의 앳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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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 의원 노무현은 주목 받았지만 다음 선거에서는 낙선했지요?

“부산에서 떨어지고 나서 그 해 말에 대선이 있었는데 당시 김대중 후보가 떨어졌잖아요. 그때 당으로 전라도 사람들이 전화를 해서는 울면서 ‘경상도에서 몰표가 나와서 김영삼이 됐다’, ‘전라도가 이기려면 자식을 많이 낳는 수밖에 없는 거냐’고 하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얼마 있다가 제가 결혼을 해서 신혼여행을 갔어요. 한 달간 미국을 여행했죠. 여행기간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는데, 그 결과 ‘내가 노 의원을 대통령을 만들어야겠다’ 결심했죠.”

-총선에서도 떨어진 상황인데, 왜 그런 생각을 했나요?

“정치개혁에 대한 신념, 인간에 대한 애정이 굉장히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이라면 한국사회에 한 번 더 진화를 꾀할 수 있겠다고 믿었죠. 신혼여행 끝나는 날 집사람에게 내 생각을 말했어요.”

부인 이정숙씨는 당시 부산매일신문의 정치부 기자였다.

-부인이 뭐라던가요?

“’그만 얘기하고 밥 먹읍시다’ 하더군요. 하하.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묻더라고요. 듣더니 집사람 얘기가 ‘에너지는 참 강하고 좋은 사람인데, 과연 이 보수적인 정치판에서 안정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을까’ 였어요.”

돌아와서 그는 일단 노 전 대통령을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도록 했고 상위로 당선이 됐다. 당에서 목소리를 낼 근거를 만들어 두려는 출마였다. 그리고 95년 처음으로 치러지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연구소를 만들었다. 선거를 준비하는 후보들을 돕는 취지였다. 그는 노 전 대통령에게 계획을 설명을 하고 ‘지방자치연구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노 전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름에 반드시 ‘실무’를 넣자는 의견을 냈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로 하자는 거다. 다른 저의가 있는 연구소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견제를 피하려는 거였죠. 그걸 보면서 이 사람은 뜻이 확실하구나 다시 한 번 생각했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기회가 왔다. 조순 전 부총리가 서울시장 출마를 결심한 거다. 조 전 부총리 쪽에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그는 꾀를 생각해냈다. 상호보완 차원에서 노 전 대통령을 부시장 러닝메이트로 발표하는 방안이었다. 조 전 부총리 쪽에선 ‘좋다’고 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을 설득하러 갔다. 노 전 대통령은 “괜찮은 생각인데? 내가 하루만 생각해보고”라고 답했다. 다음날 오전 7시, 노 전 대통령에게 보자고 연락이 왔다. 노 전 대통령의 결론은 “나는 부산으로 가야겠다”는 거였다.

“가면 떨어지실 텐데 왜 그러시느냐고 엄청 반대를 했죠. 그랬더니 이러시더군요. ‘민주주의는 꼭 내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투표용지에 지지층이) 찍을 수 있는 칸을 만들어 줘야 하는 거다. 여당 후보가 있으면 야당 후보도 있어야지.’ 그래서 부산으로 가게 된 거예요. 이런 게 사람을 감동을 시키는 면이죠. ‘이 사람은 확실히 남다른 면이 있구나’ 하는.”

우리가 알다시피 그 해 부산시장 선거에서 노 전 대통령은 또 낙선했다. 그리고 이듬해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했고 또 패했다. 당시 승자는 이명박 전 대통령.

◇말리는 이광재에게 ‘논쟁은 그만, 또 부산으로’
한국일보

‘바보 노무현’이라 불릴 정도로 지역주의의 극복을 외치며 부산에 도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은 역대 그의 선거 포스터를 모은 것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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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달아 졌던 시기군요.

“3연패죠. 당시는 대통령이 ‘정치 그만하자, 너무 힘들다’ 했어요. 집안 어른들도 ‘야, 너 노무현 더 따라다니다가는 굶어 죽는다’면서 돈을 모아줬죠. 다른 살 길 찾아보라고요. 그런데 그때 그만두면 진짜 무너질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 돈으로 인사동에 밥집을 차렸어요. 정치란 게 밥 먹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가잖아요. 그리고 또 (참모 중) 한 사람은 경복궁역 바로 옆에 건물을 얻어서 나중에 이곳에 플래카드 걸자고 (노 전 대통령을) 압박했죠. 도망 못 가게 한 거예요.”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또 부산으로 갔죠?

“98년 재ㆍ보선에서 종로에서 6년 만에 당선이 됐죠. 근데 2년 뒤 총선에서 또 부산(북ㆍ강서 을)으로 가시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쌍수를 들어서 ‘왜 이러십니까’ 만류했죠. 토론을 여러 차례 했어요. 계속 반대를 하니까 어느날 아침에 그러시더군요. ‘야, 이 논의 끝내자, 나는 부산으로 간다, 끝! 그만.” 속으로 얄미우면서도 지도자라는 게 저런 거구나, 남다른 결기로 사는 거구나 싶었죠.”

노 전 대통령은 부산에서 그렇게 세 번째 낙선을 했고, ‘바보 노무현’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보좌진들은 부산의 선거살림을 정리하고 올라오기 전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서” 이런 플래카드를 부산시내에 내걸었다고 한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진짜 시작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예상을 깨고 초반부터 승기를 잡아 후보가 되는 드라마를 썼다.

-반전을 예상했나요?

“당시에 노무현이란 사람의 호감도는 80% 정도로 높았지만 지지율은 1% 수준이었죠. 하하. 사람은 좋지만 당선 가능성을 낮게 본 거죠. 하지만 당시 이인제 후보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이 후보가 100평짜리인가 (경선) 사무실을 냈다고 하기에 제가 그랬죠. ‘안 된다는 집 도와주는 법 없다. 우리는 그보다 더 큰 사무실을 얻자’고. 그래서 금강빌딩 한 층 전체를 빌렸어요. 집기를 갖다 놓고 출근해서 보니 전 층에 달랑 7명 있더군요. 하하. 진짜 돈이 없을 때라 집도 팔았죠. 당시 보라매공원 옆에 재건축 아파트 큰 평수를 하나 당첨 받아 갖고 있었거든요. 집사람한테는 벤처 투자를 좀 해야겠다고 하고는 팔아서 보탠 거죠.”

-경선 전략은 어떻게 짰나요?

“제주, 울산, 광주 세 지역에 집중했어요. 나머지는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세 곳이 경선이 치러지는 첫째, 둘째, 셋째 지역이었거든요. 제주에는 아예 제가 내려가 있었죠. 그때 인생은 절대 공짜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가장 먼저 자원봉사 하러 와준 사람이 노 대통령이 부산에서 변호사 할 때 무료 변론해준 택시기사였어요. 그리고 (의원 시절) 탑동 매립으로 살 길이 막막하던 해녀들을 도운 적이 있는데, 그 분들도 왔죠. 배려하고 베푼 만큼 인생은 되는 거더군요.”

-후보가 됐지만, 대선까지 험난했죠. 정몽준 당시 후보가 대선 전날 단일화 합의를 깼으니까요.

“민주당 후보로 확정되고 나서 일찌감치 대비를 했어요. ‘한일 월드컵’이 뜨면 정몽준의 지지도도 오를 거고 그러면 결국 후보 단일화를 준비해야 할 거라고 대통령에게 말씀 드렸죠.”

정 전 후보의 막판 지지 철회는 역풍을 불렀다. 노무현 지지층이 결집한 거다. 결과는 당선. 노 전 대통령은 경선에 이어 본선에서도 또 한번 드라마를 썼다.

◇서른 일곱에 청와대로 ‘내리막의 시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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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이 2002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서울 여의도 국회로 들어서며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V자를 그리며 인사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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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에 최고권력을 만들었고, 또 최초 결심 이후 10년 만에 이뤘네요.

“진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까요.”

-청와대 생활은 어땠나요?

“처음에 국정상황실장을 하라기에 저는 안 하려고 했어요. 왜냐면 내가 타깃이 될 게 분명하니까. 저는 다른 사람을 추천했어요. 하지만, 당시 문희상 대통령비서실장이 ‘어차피 어떤 자리에 가도 월권이니, 뭐니 말이 나올 거다’라면서 직접 하기를 바랐죠. 당시 대통령 보고서는 2, 3개만 올렸어요. 대신 질이 좋아야 했죠. 대통령은 매일 저녁 9시 전에는 보고서에 잘했다, 못했다, 어떻게 해라 하는 리스펀스(응답)를 해줬어요. 그러니 업무 강도가 엄청났죠.”

-당시 ‘실세 중의 실세’라고 불렸잖아요?

“정부가 출범하기 전에는 대통령을 자주 봤죠. 하지만 청와대에 들어가고 나서는 독대 한 적이 없어요. 청와대를 그만 두는 날 대통령 내외를 뵈었죠. 나보다 더 유능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게 청와대 참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죠.”

그는 호시탐탐 청와대를 나갈 궁리를 했지만 무산됐다. 결국 여당에서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사람”이란 비판을 받았고, 청와대에 들어간 지 8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권력은 칼날 위에 묻어있는 꿀을 빠는 거나 비슷해요. 그만큼 위험한 거죠.”

-그만 두고 어디에 갔나요?

“평창에 상원사라는 절에 갔어요. 3주쯤 머물렀죠. 당시 주지가 지금 월정사 주지인 정념스님이었어요. 원 없이 등산이나 다니다가 미국에 (공부하러) 갈 생각이었죠. 그런데 스님이 저를 처음 보더니 그러시는 거예요. ‘누구한테 욕을 먹을 관상은 아닌데 이상하네.’ 나중에 떠난다고 하니 잠시 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외국으로 갈 생각 말고 차라리 이 동네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어차피 미국으로 가도 그는 표적이 될 거였다. 결심했고, 2004년 총선에 출마(평창ㆍ영월ㆍ태백ㆍ정선)했다. 이어 그 다음 총선에서도 당선돼 재선 의원이 됐다. 그 사이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2008년 선거는 출마를 두고 굉장히 망설였어요. (정권이) 나를 가만 두지 않을 거니까. 지금도 그때 출마한 게 잘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당선된 해 여름에 벌써 (또 수사가 시작되는 게) 느껴졌죠. 나중에 보니 강원랜드, 석유공사, 석탄공사… 강원 출신 임직원이 있는 기관은 다 조사를 했더군요. 나를 넘어 노 대통령한테까지 가려는 거였죠.”

결국 2009년 그는 구속됐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장한테서 15만 달러(현재 환율 기준 1억7,800만원)와 2,000만원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그는 결백을 주장했고 정계은퇴 배수진까지 쳤다. 재판 와중 강원지사 선거에 출마했고 득표율 54.4%로 도민들은 그를 당선시켰다. 그러나 결국 대법원에서 징역형이 확정돼 지사 직을 상실하게 된다.

-당시 사건을 생각하면 어떤가요.

“당시 변호인이 현재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어요. 돌이켜보면 반성하게 돼요. 하지만 참 마음이 아프기도 하죠. 박연차 전 회장이 2심 때 법정에 나와 증언을 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검찰이 반대의견을 냈죠. 그런데 그걸 재판부가 받아들였어요. 박 전 회장은 1심 재판 때 총선 때 저에게 모두 10억원 이상을 주려고 했지만 거절 당했다고 했거든요. 기소 사실 네 건 중 두 개가 무죄가 났어요. 당시 박 전 회장이 2심 재판정에서 제게 돈을 줬다고 한다 해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생각이었죠. 그런데 검찰이 박 전 회장의 출석을 반대하고 그걸 재판부가 받아들여서 증언을 듣지 못하게 된 게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파요. 당시 ‘박연차 비망록’에는 누구한테 얼마를 줬는지 액수가 세세히 적혀있었지만, 내 이름은 없었죠. 박 전 회장의 증언을 듣지 못하고 2심 판결이 났고 그게 대법원에서 확정 된 것이 아쉽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어리석은 거죠.”

-설명 대로라면 억울해야 하는데요.

“박 전 회장이 돈을 주려는데 제가 하도 안받으니 어느 날은 ‘나를 못 믿느냐’고 하더군요. 그때 제가 ‘못 믿는 게 아니라 나중에 내가 다른 의미 있는 일을 하면 그 때 도와달라’고 했어요. 말로는 (거절하려고) 그랬지만, 속으로는 (진짜) 언젠가는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을 해서 그런 사고가 난 게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죠.”

대법원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추징금 1억1,400만원이 선고 됐고 지사 직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그에 앞서 2009년 4월 구속기소 돼 영등포구치소에 수감 중일 때 노 전 대통령의 비보를 들었으니 애통한 일이다(이후 그는 보석이 허가돼 4개월 여 만에 풀려났다).

◇옥중 설움 “측근들만 구속하면 됐지…”
한국일보

이광재 원장은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구치소에 수감된 몸이었다. 구속집행 정지로 27일에야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향할 수 있었다. 이 원장이 노 전 대통령의 장남 건호씨 부부와 함께 조문객을 맞으며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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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으로 풀려나기 전, 그러니까 수감된 지 두 달 만에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들은 거죠.

“벌써 10년이군요. 잠시 (교도)소장이 보자고 그래서 나가니까 얘기를 하더라고요. 면회실에는 가족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고요.”

당시 검찰을 향해선 ‘모욕주기 수사’라는 비판이 비등했다. ‘논두렁 시계’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전까지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고 유쾌하게 말을 이어가던 그는 이 대목에서는 입을 열기 힘겨워했다. 눈동자에선 처연함이 비쳤다.

“너무 좀… (검찰이) 측근들까지만 구속하면 됐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었죠… 당시 이강철 (전 시민사회) 수석이 구속되면서 그랬잖아요. 노 전 대통령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일단… 너무 죄송하죠… 너무 죄송한 거죠… (교도소에서) 그 소식을 듣고 정말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2009년이면 그 때 대통령 나이 예순 셋 밖에 안됐잖아요. 너무 부당한 거죠.”

-구속집행 정지로 구치소를 나와서 영결식에 가면서 “(노 전 대통령이) 불쌍하다”고 했었죠.

“대통령은 사리사욕이란 게 없었어요. 처음 저한테 말했듯 어떻든 역사발전의 도구가 되려고 정말 충실했다고 생각해요. 몸이 아파도 마취 같은 걸 절대 안 했어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면서. 부족한 점, 아쉬운 점도 물론 사람이니까 있지요. 하지만 그렇게 처절하게 열심히, 공적인 가치를 위해 자신을 용광로에 집어 넣은 사람을… 그러니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노 전 대통령 생전에 둘이 술을 마실 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 나는 비주류야 비주류. 사법고시 1년에 50명 밖에 안될 때 고졸자로 합격해서 대한민국의 주류사회라는 법조계에 갔어도 나는 인권변호사로 비주류였지. (정치판에서도) 민주당 가면 부산 사람이라고, 부산에 가면 전라도 앞잡이라고 하니 거기서도 주변인이었지.’ 그런 악조건이 있으니 에너지가 강했겠지만, 생을 놓고 보면 너무 안타까운 거죠.”

-나중에 노 전 대통령이 컴퓨터에 남긴 유서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노 대통령은 사생(死生)관이 분명한 분이었어요. 삶과 죽음에 연연함이 적었죠. 사는 건 뭐고 죽는 건 뭐냐, 결국 사람답게 사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노 전 대통령은 인생에서 어떤 사람인가요.

“좋은 스승이었고, 나를 깊이 신뢰해주셨죠. 뭐라고 그럴까. (함께 한 시간이) 인생의 꿈 같은 시간이었죠.”

그에게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지 물었다. 한국일보의 보도사진 데이터베이스를 아무리 뒤져도 그런 장면은 없기에,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사진이라도 기사에 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에게도 없었다. “비서는 얼굴이 없어야 한다”는 걸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하고 봉하마을에 내려 갔을 때도 다른 이들을 곁에 세우고 물러섰다고 한다. 쓸쓸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가 말했다. “그러다 보니 그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같이 찍은 사진이 없네요.”

◇’좌희정’의 안희정, 면회는 안가
한국일보

이광재 원장은 "경제는 눈에 보이는 화폐를 모으는 일이지만, 정치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모으는 일"이라며 "거기다 정치는 많이 나눠줘야 모이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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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 성폭력 혐의로 구속 수감중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 얘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좌희정 우광재’로 불리며 각각 노 전 대통령의 왼팔, 오른팔 참모였다.

-안희정 전 지사는 언제 처음 알게 됐나요?

“88년 제가 노무현 의원의 보좌관을 할 때, 안 전 지사는 이철 의원 비서관을 했어요. 그때 이해찬 의원 보좌관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이상수 의원 비서관이 이화영 경기부지사였죠. 이 의원들이 돈을 출연해서 연구소를 차렸어요. 그래서 매주 세미나를 했죠. 그러니 보좌진도 친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항상 몰려다니는 멤버들이었죠. 그러다가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할 때 합류하게 됐어요.”

-‘좌희정 우광재’로 불렸죠.

“그런데 희정이와 저는 많이 달랐죠. 안 전 지사는 치밀하고 꼼꼼하고 조직 관리에 능했죠. 저는 얼렁뚱땅… (웃음), 기획을 했고요.”

-안 전 지사 사건이 터졌을 때 조언 해준 게 있나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니요. 사람이 작은 일에는 조언이 되지만, 큰 일이 닥치면 결국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것 같아요.”

-면회는 갔나요?

“안 갔어요. (보면) 마음 아프잖아요.”

◇“특사서 제외 소식에 기뻐해”
한국일보

0이광재 원장은 여러 굴곡을 겪으며 인상도 부드러워졌다. 사진은 참여정부 출범 두 달 째인 2003년 4월 21일 당시 국정상황실장이던 이 원장(오른쪽)이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 앞서 정만호 정책상황비서관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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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광재’라는 이름이 다시 언론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바로 대통령의 3ㆍ1절 특사 발표 때다. 그가 복권 대상에 포함될지가 관심이었다.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징역형 이상이 확정되면, 향후 10년간 피선거권이 없다. 복권된다면 내년 총선 출마를 점쳤을 텐데, 특사에서 제외됐다. 그에게 다시 정치를 할 생각은 없는지 물었다.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그가 답을 한 유일한 사안이었다.

“없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가요?

“꿈이 없잖아. 시대정신이 없잖아요. (미소) 시대적 소명과 사명이 있고 그걸 밀고 갈 힘이 있어야 세상에 나가는 거죠. 수천 년 전에 제갈량이 출사표 낼 때는 출사할 게 있어야 나간 거잖아요. 아직 명분이 충만하지 않은데 뭘 나가겠어요. 시대정신을 만드는 일을 돕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복권 대상에서 제외됐을 때 그럼 어땠어요?

“저와 주변 모두 기뻐했죠. 하하.”

-여시재 원장 일에 만족하나요?

“우리나라가 산업화, 민주화 이후 어디로 갈지 공론을 모으지 못하고 있잖아요. 배고픈 문제는 해결했는데 배 아픈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죠. ‘질투는 나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동업이 우리의 DNA가 돼야 해요. 그래야 공존해서 앞으로 나아가죠. 여시재 일을 열심히 하려는 이유가 바로 이런 비전을 만들고 싶어서예요. 대한민국 국가 미래를 설계하는 곳이 없잖아요. 공부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이지. (웃음)”

여시재는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이 사재 4,400억원을 출연해 만든 민간 싱크탱크다. 하지만 철저히 독립돼있다. 조 회장도 2016년 공식 출범 직전 이사진에서 물러났다. 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여시재의 현재 연구 주제를 디지털 시대와 100세 시대라는 변화에 맞는 신문명사회, 동북아의 새로운 협력 관계, 한반도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 양성으로 정리해 설명했다.

◇“공존할 룰을 찾아야, 연정 왜 못하나”
한국일보

이광재 원장의 사무실은 산과 가깝다. 근처인 자택에서 매일 걸어서 출근한다. 책과 자연 가까이 사는 그는 홀가분해 보였다. 고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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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중요한 시기에 집권했죠.

“결국은 공존할 룰을 찾아내는 게 중요한 문제라고 봐요. (참여정부 때) 실패했던 연정 같은 걸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여야가 지금은 감정의 골까지 깊어졌는데 국회가 합의하지 못하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잖아요.”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은 시대를 앞서간 생각이었죠.

“처음 구상을 들었을 때 우리는 반대했어요. 그러니까 책을 하나 주시더군요.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였어요. 무턱대고 반대만 하지 말고 읽고 공부하라는 거죠. 상대 당을 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느냐는 거예요. 나는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진보 대통령이라고 진보정책만 다 펼 수 있는 게 아니고, 보수 대통령이라고 보수정책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결국은 중도로 가게 된다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었죠.”

-문재인 대통령에게 ‘동업의 DNA’가 있을까요?

“대통령도 ‘협치’를 강조하잖아요. 당장을 생각하지 말고, 국민이 손해보지 않는 쪽으로 가야 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대선 전에 후보들이 공약을 내놓잖아요. 사실 비슷한 게 많거든요. 그 중 큰 공감대를 이룬 건 아예 선거 전에 법으로 통과시켜 놓아야 해요. 그러면 누가 당선되든 국민은 손해 보지 않잖아요. 그리고 그 법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발의한 사람들은 연정의 대상으로 삼는 거죠. 장관으로 발탁할 명분도 있고요.”

-앞으로 어떻게 살 생각인가요?

“공적으로는 공부하고 정책이나 비전 만드는 걸 좋아하니 그 일을 계속 하고 싶고요. 개인적으로는 책을 한 권 쓸 준비를 하고 있어요. ‘세계 흥망사 10대 요인’을 정리해놨어요. 예를 들면, ‘미국이나 영국, 네덜란드가 왜 위대한 나라가 됐는가. 그건 교육의 힘이다. 어떻게 교육에 눈을 뜨게 됐는가’ 이런 걸 분석하는 거죠. 어떤 나라가 흥하고 망하게 된 요인을 국가전략에 연결시키는 거예요.”

-지금 행복한가요?

“내 능력이 부족한 것 말고는요. 하하. 진짜 잡념 없이 불철주야 탐구하거든요. 그런데 내 역량이 부족해서 마음이 불편해요.”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꿈을 이뤘을 때도 행복했나요?

“개표 결과를 대통령 내외와 몇몇이서 (여의도) 맨하탄호텔에서 지켜봤거든요. 당선이 확실해지고 나서 다른 사람 같으면 아마 대통령 모시고 (당선 인사를 하러) 함께 갈 텐데 저는 집으로 가서 잤어요. 취임식 때도 가지 않았죠. 청와대에서 TV 화면으로 대통령이 선서를 하고 청와대 안으로 들어오는 걸 봤죠. 그러면서 이제 고생 시작이구나 싶었어요. 사람들은 청와대 들어서는 게 정점이라고 볼지 모르지만, 사실 선서할 때가 정점이고 청와대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리막의 시작이죠. 우리도 박수 받고 끝나는 대통령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켜온 삶의 도가 뭔가요?

“남을 도와주면서 살자. 살면서 남에게 도움 받는 시간보다 내가 남을 돕는 시간이 더 짧더라고요. 그러니 내가 도울 수 있을 때 돕자고 생각해요. 인생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그를 본 건 10년 만이었다. 영등포구치소를 나서 상복을 입고 서거 닷새 만에 조문을 가는 길에 만났었다. 그때 그는 “목숨이 붙어있는 날까지 권양숙 여사와 가족들과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1년에 한 번씩 여사를 모시고 가까운 이들과 여행을 간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이 꿈에 나오는 날이면 봉하마을로 뭔가를 보낸다고 한다. 그렇게 ‘의리’를 지키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정치는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아직까지 그 수렁에서 깨끗하고 온전하게 나온 이를 보지 못했다. 어쨌든 수렁에 다시 들어갈 생각이 없다는 그의 얼굴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한국일보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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