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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左右 편싸움에 분열된 나라 개탄하며 "애국자여, 일터로 가라"던 자유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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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본지 팔면봉 쓴 오기영, 정치 싸움 극심했던 해방 정국

진영 뛰어넘어 理性 회복 외쳐… 책·칼럼 묶어 전집 6권 출간

조선일보

1947년 10월 5일 흥사단 제2차 국내 대회 중 창덕궁에서 기념 촬영을 한 오기영(가운데 원). /흥사단


'좌(左)가 한 번 민중을 부르면 다시 우(右)가 또 불러냈다. 지도자의 분열은 당연히 민중의 분열을 결과하여 직장마다 좌우의 편싸움이 벌어지고 이래서 또 공장에는 먼지가 앉은 채 기계는 동록(銅綠·구리에 녹이 슬어 생기는 독성 물질)이 슬었다.'

산업 재건은 뒷전인 채 정치 싸움만 일삼는 세태를 꼬집은 동전 오기영(東田 吳基永·1909~?)의 기고문이다(조선일보 1946년 2월14일 자). 찬탁·반탁 시위가 격렬하게 대립하던 해방 정국에서 그는 '독립의 첩경은 경제 회복'이라며 '진정 애국자라면 직장으로 가라'고 호소했다.

일제강점기 조선·동아일보 기자를 지내고 해방 이후 조선일보에 촌평 '팔면봉'(八面鋒)을 집필한 오기영 전집(총 6권·모시는사람들)이 나왔다. 동전이 해방 직후 낸 '사슬이 풀린 뒤' '민족의 비원' '자유조국을 위하여' '삼면불'에 일제시대 쓴 기사(3면 기자의 취재)와 칼럼(류경 8년)을 묶어 2권을 보탰다.

동전은 열 살 때 3·1시위에 참여했고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는 등 일제와 맞섰다. 아버지도 3·1운동으로 투옥됐고 형과 동생도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옥고를 치렀다. 조선·동아일보에서 13년간 일한 오기영은 해방 이후 경성전기에 들어갔다. '황폐해진 생산 부문의 재건을 위하여 일졸오(一卒伍)로서 투신해볼 의욕에 불탔던 것이다.' 그는 업무 틈틈이 '팔면봉'을 비롯한 평론을 신문과 잡지에 썼다. '팔면봉'은 1924년 10월 3일 자부터 1면에 싣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오는 조선일보 장수 코너다. 오기영은 좌우 대립이 극심한 해방 정국에서 어느 한쪽에 몸담지 않고 양쪽을 비판했다. 좌익의 찬탁 선회를 '소련 정책을 지지하기 때문'이라며 날을 세웠다. 우익엔 '비분만이 능사가 아니매 은인과 냉정이 요청된다'고 냉정을 호소했다. '자유로운 비판자에겐 중간파도 하나의 비판의 대상일 뿐'이라며 중간파와도 거리를 뒀다.

'너는 우도 아니요 좌도 아니요 대체 무엇이냐 하는 질문도 많이 받았고, 혹은 중간파라는, 심하게는 기회주의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자유주의자로 자처해본다.' 그는 1947년 출간한 정치·사회평론집 '민족의 비원'에서 자유주의자를 선언했다. '모두가 제 편이 아니면, 자기주장의 공명자가 아니면 적으로 몰아치는 이 혼돈 속에서 이런 편당적인 공격과 비난을 쌍방으로부터 받되 견딜 만한 용기가 없이는, 진실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진영에 가담해 목소리 높이기에 몰두한 해방 정국에서 '이성(理性)의 회복'을 외치며 '자유주의자'를 고집한 오기영의 존재는 독특하다. 그래서 1949년 6월 고향인 북으로 간 그의 선택은 아쉽다. 오기영의 행적은 1962년 10월 과학원 연구사(硏究士)를 마지막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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