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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책과 삶]국경순찰대원을 자원했던 미국 청년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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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장벽이 되고

프란시스코 칸투 지음·서경의 옮김

서울문화사 | 328쪽 | 1만5800원

경향신문

갱단의 폭력과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중남미의 사람들

목숨 건 밀입국 감행의 실상과

가혹한 단속 현장 생생 목격담

미국서 출간 후 사회적 논란 반

트럼프 진영의 사람들도

“면죄부 받으려 책 냈나” 비판

저자 “비극 참상 알리려 했다”


“트럼프를 보고 느끼는 것 없어요?” 편집국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이런 질문이 날아들었다. 한창 제주 예멘 난민 문제가 사회적 현안으로 불거졌을 때였다. “국제 뉴스 안 봐요? 트럼프가 국경에 장벽 세우려는 거 보고 좀 배우는 거 없냐고. 도대체 왜 그 마약쟁이들을 받아야 한다고 난리야, 그 거지새끼들을!” 그는 전화를 끊기 전까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마약쟁이들’ ‘거지새끼들’이란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이 책은 그가 모범사례로 꼽았던 미국의 국경지대에서 중남미 불법 이민자들을 쫓아내는 일을 담당했던 한 국경순찰대원의 고백이 담긴 이야기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에 대해 그토록 확신 어린 증오를 품고 있던 전화 속의 그와 달리, 이 책의 저자인 프란시스코 칸투는 자신이 추방한 불법 이민자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든다.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한 칸투는 국경에 관한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에 신물이 났다. 그는 현장에서 국경의 실태를 직접 보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국경순찰대에 자원한다. 나중에 깨닫게 되지만, 순진한 생각이었다.

경향신문

지난해 11월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에서 국경순찰대가 발포한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는 온두라스 모녀의 모습. 기저귀만 찬 어린아이 둘이 비틀거리며 어머니를 따라 뛰고 있다. 이 사진은 “이민자들의 절박하고 슬픈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다”는 평을 받으며 지난 4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로이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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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를 들려줄까?” 순찰대원 학교에서 신입대원들에게 체력 훈련을 시키던 교관이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너희들처럼 풋내기였던 시절, 엘살바도르 난민들과 맞닥뜨렸지. 만약 내가 포기해버렸다면 그가 날 죽였을 거야. 나는 진창 속에서 끝까지 그와 싸웠고, 마침내 그를 제방 너머 물속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 사내는 수영을 하지 못했어. 한 시간쯤 후 나는 부표줄 근처에서 그의 사체를 수습했지.” 그는 말했다. “그러니 너희를 지킬 것은 너희 몸뿐이다. 모든 근육이 그만하라고 울부짖어도 페달을 멈추지 마라!”

그 때문이었을까. 칸투는 사격장에서 혼자 연습을 하다가 표적 위에 앉은 새를 보고 문득 새를 쏘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록 미물일지언정, 생명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단 한 발로 새를 떨어뜨렸다. 새의 사체는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그는 점점 사체에 익숙해진다. 원래 순찰대원들이 하는 임무 중 하나가 46도에 달하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황무지를 돌며 시체를 거두는 일이다. 순찰대원들은 황무지에서 밀입국자들이 만들어 놓은 은신처를 발견하면 물병을 베어 물을 땅에 쏟아버리고, 배낭을 찢어서 옷과 음식을 불태운다. 흩어져 도망쳤던 자들이 다시 은신처로 돌아왔을 때 숨겨둔 물과 양식이 사라져버린 것을 보면 밀입국을 포기하고 돌아갈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러나 그들의 무책임한 바람과 달리 황무지에는 물과 식량을 뺏긴 채 길을 잃고 정처없이 헤매다 결국 탈수와 열사병으로 쓰러진 자들의 시신과 끝내 수습조차 되지 못한 이름 모를 백골들이 여기저기 나뒹군다.

칸투는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그가 쫓아낸 사람들 대다수는 ‘마약쟁이’들이 아니었다. 교관은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머리와 사지를 절단해 놓은 시신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제군들이 앞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런 자들이다”라고 했지만, 실제 그가 상대하고 있는 자들은 겁에 질린 순박한 시골사람들이었다.

그에게 잡힌 한 밀입국자는 지구대에서 강제송환 절차를 밟는 순간에조차 “잠깐이라도 지구대에서 제가 할 일이 없을까요? 쓰레기를 내가거나 청소를 할 수 있어요.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일거리를 찾으러 왔거든요”라고 애원한다. 멕시코 와하카에서 온 한 밀입국자는 칸투가 배낭 안의 음식들을 던져버리려는 순간 그러지 말라고 속삭인다. “그 물병 안에 제가 농장에서 직접 담근 메즈칼주가 있어요. 지금이 제일 잘 익었을 때입니다. 가져가 드세요. 상하지 않았어요.” 황무지를 함께 건너다 죽은 숙부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16세, 19세 두 청소년은 결국 떼어져 강제 송환됐다. 칸투는 아이들에게 집에 돌아가 있으면 나중에 시신이 그곳으로 보내질 것이라고 설명해줬지만, 사실 자신도 속으로는 그렇게 되리라 믿지 않는다. 결국 그는 가용 인원이 부족하다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시신을 방치한 채 철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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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노라 사막을 횡단해 밀입국하려던 불법 이민자가 남기고 간 가방(위쪽 사진). 저자인 프란시스코 칸투. 로이터통신·서울문화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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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투를 비롯한 순찰대원들이 체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멕시코 등 사실상 ‘붕괴국가’ 상태에 놓인 중남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다. 부모 품에 안겨 온 두 살배기부터 혈혈단신으로 떠나온 10대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미국에 가려는 이유는 마약 갱단의 폭력과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멕시코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지난 10여년 동안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펼쳤지만, 사망자 20만명 중 상당수는 애꿎게 충돌에 휘말린 어린이, 청소년, 신문팔이, 버스운전자들이었다. 과테말라나 온두라스의 갱 집단은 어린 청소년들을 직접적 타깃으로 삼아 조직에 끌어들인다. 거부하면 잔인하게 보복을 한다. 그러니 부모들은 자식을 미국에 보내기 위해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모아 브로커에게 건넨다. 이 과정에서 브로커에게 속아 인신매매 조직에 넘겨지는 경우가 워낙 많다보니, 몇년 전부터는 밀입국 희망자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직접 사람을 모집해 집단으로 뭉쳐 이동하는 이른바 ‘캐러밴’ 행렬까지 생겨났다.

매일 밤 꿈에 토막 난 시체가 등장하고 어금니가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는 등 원인 모를 악몽에 시달리던 칸투는 결국 2012년에 4년간 일했던 순찰대를 그만두고 바리스타가 된다. 그러나 국경의 비극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붙었다. 바리스타로 일하는 동안 새로 사귄 멕시코 불법 체류자 호세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다 순찰대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칸투는 순찰대로 일할 때의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듯 호세가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돕지만, 30년 동안 미국에 정착해 두 자녀를 낳고 성실하게 살아온 호세는 결국 멕시코로 강제추방돼 하루아침에 가족들과 생이별하게 된다. 호세는 칸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곳 멕시코에서는 거리에서 마약 조직을 비방하는 얘기도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조직과 끈이 닿아 있어서 언제 밀고할지 알 수 없거든요. 거리에서 납치, 살인이 일어나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습니다. 아빠로서 아이들을 이런 곳에 데리고 올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에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밀입국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미국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내가 밀입국하다 체포되는 것은 법체계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이 있고, 법은 지켜져야만 하지요. 하지만 나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미국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이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은 지난해 미국에서 첫 출간된 후 적지 않은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됐다.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 옹호자들과 국경순찰대가 이 책을 싫어한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책은 반트럼프 진영의 일각, 특히 미국 내 불법 체류자와 히스패닉들로부터도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됐다. 칸투가 국경순찰대로 일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책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국경순찰대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다. 국경순찰대의 폭행으로 사망한 밀입국자의 숫자를 업데이트하는 웹사이트가 있을 정도다. 이들은 “국경순찰대의 폭력적인 행위를 함께 저질러 놓고서도, 비극의 목격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통해 면죄부를 받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며 칸투의 사인회 장소 앞에 몰려가 집회를 열고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칸투는 이 같은 논란에 대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국경의 실상을 순찰대 내부의 시각에서 생생하게 보여주려 했을 뿐 (순찰대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 책에 대한 여러 의견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칸투를 포함한 국경순찰대원 상당수는 밀입국자들과 같은 피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히스패닉들이다. 이들 중에는 어린 시절 멕시코에서 자란 사람도 있고, 멕시코에 아직 사촌들이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칸투의 한 동료는 “순찰대에 들어온 후 국경 남쪽으로 한번도 간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칸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구성하는 정체성 중 어느 한 부분을 최대한 부정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일까. 이 책의 제목처럼 선은 장벽이 되고, 장벽은 사람을 국적에 따라 ‘너’와 ‘나’로 가른다. 그리고 이 장벽은 ‘나’와 ‘나’의 사이까지 갈라놓는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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