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편을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한 혐의 등으로 구속돼 신상정보 공개가 결정된 고유정(36)이 얼굴을 가린 채 6일 제주시 제주동부경찰서 조사실에서 유치장으로 향하고 있다. 경찰은 지난 5일 신상공개위원회 회의를 열어 범죄수법이 잔인하고 결과가 중대하고 국민의 알권리 존중 및 강력범죄예방 차원에서 고씨에 대한 얼굴과 이름 등 신상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2019.6.6/사진=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전 남편 살해 및 시신훼손·유기 혐의를 받고 있는 고유정씨의 얼굴 공개가 무산된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고 있다.
경찰이 지난 5일 신상공개심의위원회를 통해 신상공개를 결정했음에도 이틀이 지난 7일 오전 현재까지 제대로 얼굴 공개를 하지 않고 있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씨는 6일 오후 제주동부경찰서 진술녹화실에서 진술을 마치고 유치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취재진에게 노출됐지만, 머리카락을 풀어 내리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렸다.
지난 5일 제주지방경찰청 신상공개심의위원회가 고씨의 얼굴과 이름 등 신상공개를 결정했지만 7일 오전 현재, 이름과 나이만 공개됐다. 고씨가 경찰서내 이동 중 적극적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을 경찰이 사실상 용인해 주면서 얼굴 공개가 경찰 수사단계에선 제대로 안 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경찰이 향후 고씨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다시 얼굴공개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검찰 송치 이후에나 얼굴 공개가 가능할 수도 있다.
◇'흉악범 얼굴은 공개해야한다'는 취지로 2011년 법령화
피의자 얼굴 공개는 강력범죄자의 신상까지 보호하는 것은 과하다는 비판여론에 따라 강호순 연쇄살인사건 직후인 2011년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이 개정되며 법령에 명시됐다. 제8조의 2(피의자의 얼굴 등 공개)'에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 공개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며 이를 위한 엄격한 요건도 마련됐다.
해당 조항에 따르면 성폭력·살인·강간·강도 등 특정 강력범죄를 저질렀고 충분한 증거가 있으면서 국민의 알권리 보장과 범죄예방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 공개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피의자가 청소년인 경우엔 공개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제8조의2 제1항의 1~4호를 모두 충족해야 얼굴 등 신상공개가 가능하도록 돼 있다. 고유정씨의 경우 모두 충족한다는 판단하에 신상공개심의위원회가 얼굴 등 공개를 결정했다. |
게다가 별도 기구인 신상공개심의위원회를 통해 판단을 받았으면 그 결정이 실행되도록 경찰이 '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운용 변호사(다솔 법률사무소)는 "그동안엔 얼굴 공개의 방법이 이동 중 언론 노출로 하는 게 관행이었는데 피의자가 적극적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에 대해 경찰이 선례가 없으니 다른 방법을 시도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며 "얼굴공개를 강제로 집행할 마땅한 방법을 경찰이 찾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노래방 도우미를 교체해달라는 손님과 말다툼 끝에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 유기한 변경석씨(34·노래방 업주)가 29일 오후 경기도 안양동안경찰서에서 수원지방검찰청 안양지청으로 송치되고 있다. 2018.8.29/사진=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책임 추궁' 두려워 강박적으로 마스크 씌우는 경찰
형사사건을 주로 담당하는 한 변호사는 "수사기관에서 피의자에게 마스크를 강박적으로 씌우거나 신상공개에 소극적인 이유는 나중에 혹시라도 무죄로 밝혀졌을 경우 얼굴 공개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피의자가 사후에 인격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한 경우가 있긴 하다. 헌재는 2012년 보험사기 혐의로 구속됐던 A씨가 경찰 조사 과정이 촬영돼 언론에 공개돼 신상이 노출된 것이 헌법 제10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인격권과 신체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낸 헌법소원에서 피의자 A씨의 손을 들어줬다.(2012헌마652)
헌재는 A씨 사건에서 인격권 침해여부를 위헌여부 판단기준인 △목적의 정당성 △침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에 비춰볼 때 공인이 아닌 일반 피의자에 대한 인격권 침해는 과도한 조치라고 봤다. 보험사기라는 범죄가 강력범죄는 아니었기 때문에 알 권리라는 공익성보다 개인 인격권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헌재는 '강력범죄'가 아닌 경우엔 피의자 인격권 존중이 더 중요한 가치일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보험사기범이었던 A씨 사례와 달리 고씨의 경우엔 '강력범죄'에 해당한다. 얼굴이 공개 된 후 나중에 인격권 침해를 이유로 헌재에 헌법소원을 청구해도 헌재가 고씨 손을 들어 줄 가능성은 낮다. 현행 법령에 따른 공개절차가 적법하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미국·영국·일본…피의자 신상 대부분 공개
미국은 '피의사실공표죄'가 없다. 따라서 피의자 체포시부터 언론에 얼굴이 그대로 공개된다. 미국 수사당국과 언론에선 혐의 입증 전이라도 피의자가 그대로 노출된다.
영국도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을 대부분 공개한다. 국민의 '알 권리(right of know)'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우리 형사법체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선 강력사건이 발생하면 그 즉시 피의자 얼굴 등 신상이 공개된다.
한 경찰행정 전문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수사기관이 피의자에게 일괄적으로 마스크와 모자 등을 제공해 적극적으로 인격권을 보호하는 경우는 없다"며 "일부 인권단체 등의 질책이나 반대 여론에 수사기관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어 문제"라고 지적했다.
8살 초등학생을 유괴해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천 초등생 살해 사건'의 공범 박모양과 김모양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살인방조 등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18.4.30/사진=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흉악범 신상공개 '의무화' 법안…국회서 3년째 표류
20대 국회에서 살인·강간·아동성폭행 등 강력사건을 저지른 흉악범의 신상정보를 '원칙'적으로 공개토록 하는 법안이 2016년 7월 발의되기도 했다.
조경태 자유한국당 의원이 낸 '특정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은 "공개할 수 있다"로 돼 있는 해당 조항 문구를 "공개하여야 한다"로 바꾸는 내용이다. 경찰 등 수사기관이 신상공개 여부를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않게 하는 법안이다.
하지만 이 법안에 대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남궁석 수석전문위원은 "신상정보 공개로 인해 헌법이 정하는 무죄추정의 원칙,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반될 소지가 있으며 피의자의 인격권, 프라이버시권,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주장들이 제도 도입 초기부터 지적된 바 있다"는 내용으로 검토보고서를 냈다.
이후 법안은 법사위 제1법안심사소위원회에 회부된 채 단 한 차례도 논의되지 않고 묵혀있다.
변호사 출신인 손금주 의원도 2018년 10월 거의 같은 내용으로 개정안을 발의했다. 손 의원 안은 '흉악범 신상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공개하는 경우 공공의 이익에 비해 피의자의 인권에 미치는 영향이 현저하고 중대하다고 판단될 때에는 심의를 거쳐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로 개정토록 해 오히려 '비공개'를 예외로 하자는 방안이다.
손 의원은 앞서 2017년 9월엔, 청소년 흉악범에 대해서도 신상공개 가능하도록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제8조의2 제1항 제4호를 삭제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2017년 3월 인천 연수구 한 공원에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초등학교 2학년 A(당시 8세)양을 자신의 집으로 유괴해 살해한 뒤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하고 유기한 혐의로 기소된 김모(당시 17세)양과 박모(당시 18세)씨는 범행당시 청소년에 해당돼 신상이 공개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해선 지난해 9월 대법원에서 각각 징역 20년과 13년이 선고됐지만 아직까지 얼굴 등은 공개 되지 않고 있다.
손 의원의 두 개정안도 법사위 제1법안소위에 회부된 채 아직 제대로 논의가 시작되지 않았다.
유동주 기자 lawmaker@mt.co.kr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