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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안부럽다, 인구 73만 시애틀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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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미래탐험대 100] [24] 첨단도시로 변신한 시애틀

기업생태계에 관심 많은 27세 신평재씨

"뉴욕에 살면서 창업도 두 번 해 봤는데, 지난해에 시애틀로 이사 왔습니다. 소프트웨어 공부를 좀 더 해보려고요."

지난 20일 워싱턴주(州) 시애틀 구(舊)도심 '파이어니어 스퀘어'에서 열린 '뉴테크 일자리 박람회'에 온 프로그래머 퀸 콕스는 나와 동갑인 스물일곱이었다. 그는 시애틀로 향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동네에 소프트웨어 고수(高手)가 진짜 많거든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시애틀'이란 도시 이름에서 첨단을 떠올린 이는 많지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MS) 본사가 창업자 빌 게이츠의 고향인 시애틀에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들릴 정도였다. 이런 시애틀이 미국의 가장 화끈한 첨단 도시로 변신했다. 2010년 미국 최대 인터넷 상거래 기업 아마존이 본사를 이전한 후 페이스북·구글 등 거대 기업의 제2 캠퍼스가 속속 문을 열고 이 기업 출신들이 만든 스타트업도 여럿 세워지고 있다.



시애틀에서 고개를 들면 거대한 타워 크레인이 어디에서나 보인다. 밀려드는 첨단 기업과 직원이 입주할 새 건물을 짓는 풍경이 스쳐갔다. 시애틀의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일자리는 2014~ 2018년 1만여개가 늘어나 현재 총 23만명이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8.2%)에 이어 둘째로 높은 성장률이다.

시애틀 인구는 약 73만명으로 경기도 성남시보다도 적다. 이 도시의 창업 생태계 가치는 약 240억달러(약 27조원·'스타트업 게놈'2019년 보고서)로 서울의 약 5배 수준에 달한다. 지난해 시애틀의 초기 벤처에 투자된 돈은 약 8억5500만달러, 서울의 10배다. 2017년 시애틀의 IT 관련 신규 일자리(8200개)는 실리콘밸리(약 1100개)를 넘어섰다.

시애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현지에서 만난 기업·학교·정부 관계자들은 시애틀이 혁신 도시로 변신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사람'을 꼽았다.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①기업: "대학님, 돈 줄 테니 인재 양성을"

아마존 고위 관계자는 "2010년 아마존 본사를 시애틀로 정할 때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가 인력이었다. MS가 길러낸 소프트웨어 인재 중 일부만 끌어와도 엄청난 이득이 되리라고 보았다"고 말했다. 시애틀이 있는 워싱턴주는 IT 기반 제조업이 빈약하다. 애플·휼렛패커드같이 전자기기도 만들어내는 실리콘밸리의 회사와 달리 뇌(腦)가 핵심인 소프트웨어 산업이 도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아마존에서 4년 동안 일한 광고사업부 윤동욱 매니저는 "MS·아마존을 중심으로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이 꾸준히 유입되다 보니 구글·애플 등 실리콘밸리에서 유래한 거대 IT 기업들도 이 인력을 노리고 시애틀에 진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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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이 뿌린 ‘혁신의 씨앗’ - 2010년 시애틀로 본사를 옮긴 미국 최대 인터넷 상거래 기업 아마존. 당시 시애틀 ‘원조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의 인재 등을 노리던 아마존은 이후 또 다른 소프트웨어 개발자 산실로 작용하면서 시애틀을 혁신 도시로 만드는 동력(動力)이 됐다. /이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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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확보가 여의치 않으면 대학에 직접 인재 양성을 주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애틀을 방문하기 약 한 달 전, 아마존은 300만달러를 시애틀대에 기부해 '컴퓨터공학 프로젝트 센터'를 세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기업의 인재 영입·육성 투트랙 전략 덕분에 시애틀은 미국에서 고학력자가 가장 많은 도시(25세 이상 대졸자 비율 63%)에 올라 있다.

②대학: "화끈하게 학생 공급해 드리죠"

워싱턴대 스타트업 지원센터인 UW 코모션 라라 리틀필드 부센터장을 만났다. 그는 "기업의 대학 지원이 시애틀 스타트업·창업 생태계에 어떻게 이어지게 할지를 끊임없이 연구한다"고 말했다. 워싱턴대는 학생이 IT 기업에서 일할 경우 이를 학점으로 인정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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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왕창' 양성해 호응한다. 대학 정원 하나 바꾸기 어려워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정원이 15년째 55명에 묶여 있는 한국과 달리, 신입생을 고무줄처럼 순발력 있게 늘린다. 예를 들어 워싱턴대는 게이츠 재단으로부터 3000만달러 기부를 받은 후, 300명이던 컴퓨터공학과 신입생을 620명으로 증원한다고 발표했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카이스트·포항공대 관련 학과 신입생 전체보다 많다.

③정부: "우리 역할은 '자리' 깔아주기"

조셉 윌리엄스 전 워싱턴주 경제개발 자문(현 퍼시픽노스웨스트 국립연구소 이사)은 "워싱턴주에서 가장 건강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시애틀의 소프트웨어 분야를 망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규제는 최소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우리에겐 포드·BMW 같은 승용차 제조 회사가 없지만 그들은 모두 시애틀의 인력을 노리고 자율주행 연구소를 운영 중입니다. 워싱턴 주지사는 이에 호응해 자율주행차 실험을 위한 규제를 확 풀어주겠다는 선언서를 발표했지요. 가상 화폐같이 논란이 많은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우리는 최대한 허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정부의 역할은 이곳에 자리 잡는 기업과 인재가 맘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애틀 근로자는 주(州) 정부에 내는 소득세도 없다.

서울로 돌아오며 시애틀에서 만난 관계자들 명함을 정리했다. 뒷면은 '華盛頓大學'('워싱턴대' 중국어 음차)처럼, 부서와 이름 모두 한자로 적혀 있었다. 미·중 무역 전쟁 와중에 중국 인력까지 눈독을 들이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머리'로 승부해왔다는 서울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대로 괜찮을까.

[미탐100 다녀왔습니다]

"시애틀의 성공 공식, 판교에도 적용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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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1호점,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풋풋한 배경, 야구팀 이름이 '뱃사람(매리너스)'인 해안 도시…. 2년 전 시애틀로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 이 도시에 대해 알고 있던 건 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2017년 직접 찾은 시애틀은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이 이끄는 혁신 도시였습니다.

2년 만에 다시 찾은 시애틀은 또 다른 모습으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도심엔 페이스북·구글 같은 굴지의 IT 기업들이 새로 세운 사옥들이 버티고 있었고, 주변은 스타트업들로 빼곡했습니다. 이들의 '성공 방정식'은 단순했습니다. 기업은 대학을 적극 지원합니다. 그 지원에 힘입어 대학은 기업에 인재를 공급합니다. 이런 선순환을 보고 중국·인도 등 전 세계 인재들이 모입니다. 정부는 뒤에서 묵묵히 지원합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나라를 떠올렸습니다. 시애틀식(式) 성공 공식이 판교 테크노밸리에 적용된다면 어떨까요. 그 미래를 앞당길 수 있도록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시애틀(미국)=신평재 탐험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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