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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소설가 최인훈 막내딸 최윤경 씨 "소설 `웃음소리` 논하자셨는데…벌써 1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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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최인훈 소설가의 1남 1녀 중 막내인 최인훈 소설가의 딸 최윤경 씨를 지난 19일 오후 서울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만났다. 남산예술센터 자리는 20년 넘게 서울예대에서 교편을 잡은 최인훈 작가가 오간 자리다. 최 씨는 아버지와의 기억을 엮은 산문집 `회색인의 자장가`(도서출판 삼인 펴냄)를 출간했다. 아버지에 관한 `복합적인 감정`을 담았다.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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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戰後) 세대의 불안을 짚은 소설로는 최인훈(1936~2018)의 '회색인'이 대표적이다. 회색인(灰色人)은 최인훈 작가와 동의어였다. 그 회색인의 자장가를 들으며 자란 딸이 있다. 유년 시절 몸이 약해 자주 울며 잠든 딸에게 회색인은 부채를 부쳐주며 새벽을 맞았다. 꼭 1년 전인 7월 23일, 회색인이 떠난 뒤 딸은 깨달았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보다 많은 기억이 사라진다고. 붙잡아야 했다.

회색인과 딸의 휘발되는 기억을 문장으로 묶은 산문집 '회색인의 자장가'(도서출판 삼인 펴냄)가 출간됐다. 최인훈 소설가의 딸 최윤경 씨(46)다. 서울예대 교수였던 최인훈 소설가가 2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친 장소였던 남산예술센터에서 최씨를 만났다. 신화 이면의 부친, 바다라는 이상 등 묵직한 주제에서 시작해 모의고사에서 본 소설 '광장'이나 손녀의 초상화 등 뒷얘기도 함께였다.

"하루가 지나고 나면 더 많은 것이 사라져간다는 띠지의 글귀는, 사실 어떤 공포심이었어요. 이토록 기억이 빨리 없어지는지 몰랐으니까요. 고민하다 쓰되, 왜곡해 신화를 만들지는 말고 정직하게 쓰자고 다짐했어요. 어린 시절 일화는 퇴고가 수월했는데 근래 모습은 떠올리기가 힘들어 고치질 못했어요. 아버지는 지금 부재(不在)하시지만 '부재의 방식'으로 아직 존재하시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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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씨가 열한 살이던 1984년 5월, 아버지 최인훈과 자택 마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경계인 이명준의 삶과 죽음으로 이데올로기에 경종을 울리며 가족애를 갈구했듯, 소설가 최인훈은 늘 가족의 `곁`에 있었다. [사진 = 최윤경 씨 제공]


최인훈 작가는 강단에 서는 일 외에는 소설과 희곡에만 집중해 삶이 은거에 가까웠다. 지금은 헐린 갈현동 '하얀집'에서 벌어진 가족 일화가 책에 농밀하다. 인간과 시간과 기억의 관계를 도식으로 만들거나 심미적 효용을 강조하며 마당의 눈 치우기를 싫어했던 아버지. "무서운 분이라고 오해들 하시는데, 제대로 혼나본 적도 없어요. 저 역시 아버지가 무섭다는 무성한 소문만 들었거든요."

가족에게 무한히 살가웠던 아버지는 영문학과에 진학한 딸에게 읽힐 '리스트'를 준비해뒀다.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책 읽으라는 소리를 한 번도 안 하셨어요. 그러다 대학에 진학하자 상황이 달라졌죠. '호밀밭의 파수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등을 읽히셨어요. 당시에 아버지가 제게 읽힌 책은 어떤 '덫'이었던 것 같지만요." 지드의 소설 '좁은 문'은 회색인이 추천한 최후의 도서였다.

아버지의 단편집과 희곡집은 전부 읽었다. 단편 '국도의 끝'을 생각하면 목이 멘다. "서가의 한 책장엔 모든 쇄(刷)의 '광장'과 전작(全作)이 꽂혀 있어요. 한번은 이렇게 물어보셨어요. '윤경아, 너는 여기에서 얼마나 읽었니.' 몇 년 전에는 단편집 '웃음소리'를 다시 읽고 이야기 좀 나누자고 하셨어요. 병세가 안 좋아지셔서 오래 기다렸는데 결국 떠나셔서 이제 말씀 나눌 수가 없게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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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읽은 사람이 드문 소설 '광장'을 딸은 정작 늦게 읽었다. "몇 년 전에야 읽었어요. 못 읽겠다는 마음이었거든요. 아마도 처음 읽은 건 시험지 지문이지 않나 싶어요. 정신이 번쩍 들어 다짐했죠. '절대 틀리면 안 돼.' 2년 전 첫째 딸도 그러더라고요. 모의고사에 '광장' 또 나왔다고…. 친구들이 죄다 둘 중에 뭐가 정답이냐고, 딸에게 물어봤대요(웃음)."

회색인이 쓴 그림동화도 탁자에 놓였다. '아기고래'였다. "고래가 사는 바다는 이명준의 바다와 닮았어요. 그가 자살했다는 시선을 아버지는 잔인한 해석이라고, 삶을 버린 게 아니라 가족 모습을 찾아간 거라고 하셨거든요. 이 책 '아기고래'에 그 마음이 숨어 있어요. '아기고래는'는 어린이 버전의 '광장'이에요." 다른 책 '순이와 참새'에는 딸의 꿈을 상상하는 최인훈의 부성애로 가득하다.

인터뷰 내내, 종종 말문이 막히거나 자주 눈물이 흘렀다. 1년이 지났으니, 슬픔의 총량은 줄었을까. "아니요. 신파(新派)가 제 일이 될 줄은 몰랐어요. 그 깨달음을 마흔여섯에 해버린 거죠. 아, 인생은 신파였구나, 그걸 이제 알게 됐구나…. 죽음은 반드시 있는 일, 삶이란 그걸 견뎌내는 일 같아요. 아버지를 잃은 회색인의 딸이 쓴 책이 아니라 모두의 이면을 애도하는 책으로 읽히길 바랍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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