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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배연국칼럼] 국가의 길과 정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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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민족감정 부채질하기보다 / ‘옳은 길’ 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 세계에서 신뢰받는 나라 만들고 / 일본을 이기는 克日 모색할 때

지금 대한민국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국가의 길’과 ‘정권의 길’이다. 전자는 나라의 번영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길을 가리킨다. 후자는 정권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정략의 길이다. 두 길은 같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다. 작금의 한·일 갈등에서 우리는 어느 길로 가고 있는가.

집권여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일본의 수출 규제를 겨냥해 “이 정도 경제침략이면 의병을 일으킬 일”이라고 했다. ‘죽창가’를 페이스북에 올린 청와대 참모는 친일파 몰이를 하기에 바쁘다. 대통령까지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켰다고 말하는 지경이다. 불을 꺼야 할 위정자들이 불길에 부채질하는 꼴이다. 국민의 애국심을 이용하는 정략놀음이 안타깝다.

세계일보

배연국 논설위원


우리가 죽창을 들면 일본은 조총을 들 것이다. 1894년 우금치에서 죽창을 든 동학군은 2만여명이 목숨을 잃었으나 일본군의 전사자는 1명뿐이었다. 한국 국민 5000만명이 불매운동을 벌이면 일본 국민 1억2000만명이 맞대응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불길을 키우면 우리가 더 큰 화상을 입을 게 뻔하다. 이순신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했던 것은 치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준비도 없이 민족감정을 들쑤시면 국익을 희생해 정권의 이득을 취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집권층 일각에선 한·일 갈등이 자신들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줄 거라고 믿는 부류가 있는 모양이다. 싸움이 커지면 외교 무능과 경제 실정이 파묻히고 국민들은 정부를 중심으로 뭉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통령의 지지율은 연중 최고치로 치솟고 있다. 정부 실책을 따졌다가는 자칫 토착왜구로 찍힐 판이다.

반일은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라를 흥하게 하는 국가의 길을 가려면 분노를 누르고 이성으로 접근해야 한다. 일본의 치졸한 보복은 백번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강제징용 배상문제를 방치한 우리 정부에게도 책임이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양국과 그 국민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다’는 한·일 협정문에 우리가 서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노무현정부 시절엔 문재인 대통령이 위원으로 참여한 민관공동위원회에서 “정부가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다 2012년 “국가 간 협정이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우리 내부에서 협정과 배치되는 사법 판단이 나왔다면 괴리를 해소할 일차적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는 시각이 있다. 정부는 수수방관했다. 정부가 지난해 뒤집은 한·일위안부 합의문에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 오죽 못 미더웠으면 북한 정권처럼 ‘불가역’, ‘최종’이라는 말을 넣었겠냐는 비판이 있다. 국제 외교가에선 “한국의 행동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다”는 뼈아픈 지적도 나온다. 정부의 무능이 국가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아베 정권에 공격의 허점을 제공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국가의 길을 가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 당당하고 도덕적 우위에 서야 한다. 100년 전 3·1독립선언서에서 선열들은 “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면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얼마나 떳떳한가. 암울한 식민치하에서 꿋꿋이 지켰던 도덕적 자긍심을 왜 헌신짝처럼 팽개치는가.

일본도 9년 전 우리처럼 경제보복을 당한 적이 있다. 첨단산업 소재인 ‘희토류’ 생산을 독점하던 중국은 센가쿠열도 영토 분쟁이 터지자 이 광물의 대일 수출을 제한했다. 일본은 중국과 민관외교로 일단 숨통을 튼 뒤 희토류 수입 다변화에 나섰다. 90%이던 일본의 중국 희토류 수입 비중은 2년 만에 49%로 떨어졌고 희토류 가격도 폭락했다. 일본의 승리였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반일이 아니다. 극일이란 국가의 길을 가려면 의병을 모집하자는 단견에서 벗어나 멀리 봐야 한다. 대통령도 명견만리라고 하지 않았나.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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