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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서소문 포럼] 7·18 청와대 회동, 애프터서비스가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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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엔 경고 우리 내부는 통합

존재하는 시각차 하나로 묶어낸

4개 항 발표, 사문화돼선 안 돼

중앙일보

강민석 정치에디터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2016년 나온 미드인데, 설정이 끔찍하다. 어느 날 워싱턴DC의 국회 의사당이 폭탄테러로 무너졌다. 의회에서 연설 중이던 대통령과 각료 전원, 상원·하원 의원 전원이 몰살당했다. 미국은 대통령과 각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가 있으면, 각료 한 명은 안전시설에서 대기하다가 유사시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그게 지정생존자다.

드라마 속 지정생존자는 ‘주택도시개발부장관’ 톰 커크먼. 장관 서열은 말번(11번)에 가깝다. 정치 경험은 전혀 없다. 단지 주택 전문가일 뿐인데 창졸간에 대통령 자리를 승계했다. 그런 톰 커크먼이 난관을 뚫고 국가를 리빌딩하는 게 드라마의 줄거리지만 과정은 녹록지 않다.

대통령 임기 첫날, 톰 커크먼이 전문가 A, B를 불러 난민 문제에 관해 물었다. A가 의견을 내놓으면 B는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뭉갰고, B가 대안을 내놓으면 이번에는 A가 “상징적이고 무의미한 행동”이라고 깎아내렸다. 다시 A가 아이디어를 냈더니 B는 “임기가 가장 짧은 대통령이 되고 싶으시다면…”이라면서 A 말대로 했다간 쫄딱 망할 것처럼 말했다. 둘이 옥신각신하는 걸 보다 못한 톰 커크먼이 물었다.

“두 분이 어떤 문제에 서로 동의한 적은 있습니까?” 동시에 대답이 나왔다. A는 “예”, B는 “아니오”라고. 이조차 달랐다. 초대형 난국에서 톰 커크먼이 마주친, 극복해야 할 현실이 바로 ‘분열’이었다.

중앙일보

서소문 포럼 7/23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들이 만났다. 모처럼 좋은 그림이었다. 그런데 하필 저 장면이 생각났다. 과연 약효가 얼마나 갈까, 뭐든 진영 대결로 치환해버리는 국회로 돌아가서도 좋은 합의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해서다. 아마 우리 정치에 지독한 편견을 가져서인지도 모른다. 부디 편견이었으면 좋겠다.

이날 청와대 회동 후 나온 4개 항의 공동발표문은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었다. 1항에선 ‘대통령과 여야 대표’ 이름으로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수출 간소화 우대국가) 배제를 안보 위협’으로 규정했다. 지소미아(GSOMIA,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재검토란 말은 안 들어갔지만 꼭 그 얘기였다. 칼은 뽑지 않고, 칼집을 보여준 건 해볼 만한 시도였다고 본다.

2항엔 ‘정부의 다양하고 적극적 외교’ ‘문 대통령의 공감과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란 표현이 들어갔다. 한국당과 바른미래당, 평화당이 이구동성으로 요구한 대일특사 파견 및 한·일 정상회담 추진카드를 수렴한 문장이다. 국면이 다소라도 바뀌면 의미 있는 조항이 될지 모른다.

3항엔 ‘경제의 펀더멘털 및 소재·부품·장비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공동노력’(문 대통령 요구 사항)과 ‘범국가적 비상협력기구’(황교안 대표 제안 내용) 설치 등을 담았다. 부디 말로 끝나지 않길 바라야 할 내용이다.

4항은 ‘정부는 여야와 함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 내부의) 소통과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는 다짐이었다.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대목을 공동발표문에 담았다.

흔히 청와대 회동 뒤엔 ‘여야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는 모습을 보인 것’이란 상투적인 말로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곤 한다. 하지만 이번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시각 차이를 묶어서 (공동발표문이라는) 하나의 입장으로 만들어 낸 것” (정동영 평화당 대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와대 회동이 끝난 지 하루 만에 국회는 다시 전투 모드에 돌입했다. 추가경정예산안 처리, 정경두 국방장관 해임건의안 같은 국내 현안을 풀지 못해서다. 과연 전투 모드 속에 발표문이 얼마나 약발이 있을까 걱정이다. 발표문 4항(소통·통합 노력)을 무력화하는 움직임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절제가 아쉬운 대목이다.

4개 항의 ‘7·18 공동발표문’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이 이번 사태의 원인인지 아닌지 따위를 따지기보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공동 대응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집중했다. 그런 점에서 일본 대응의 실질적 출발점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국민 앞에 발표문 하나 내놨다고 ‘상황 끝’이 아니다. 7·18 회동은 ‘애프터서비스’가 더 중요하다.

강민석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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