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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경제와 세상]한·일관계, 루비콘강 건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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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간 이견을 봉합한 채 체결된 한일협정으로 시작한 1965년 한·일 협력체제가 무너지고 있다. 한국 수출주도성장은 1965년 체제라는 한·미·일 안보·경제 협력에 의존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번 일본 경제도발이 일본에 의존하는 소재·부품산업을 국산화할 수 있는 호기라 하는데, 국제분업 효율과 자유무역 이익을 간과하는 것이다.

경향신문

역대 정부는 소재·부품산업의 국산화와 수입선 다변화를 위해 수십년 동안 노력했다. 그 결과 소재·부품산업의 일본 수입의존도는 2001년 28.1%에서 2018년 16.3%로 하락했다. 한국의 총수입 중 일본 비중은 약 10%이므로 소재·부품 강국인 일본 소재·부품 의존도가 좀 더 높다고 비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한국은 총수출액의 52.3%를 소재·부품이 차지하며, 세계에서 일본 다음으로 소재·부품 수출을 많이 하는 세계 5위의 소재·부품산업 강국이다.

소재·부품의 일본 의존도를 줄여 나가야겠지만 그렇다고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모든 품목을 국산화하기는 어렵다. 핵심 전략품목과 수출품목으로 육성 가능한 것만 국산화하고 나머진 수입선 다변화로 가는 게 현실적이다.

한·일 경제를 무역수지 흑자인 일본이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는 가마우지 경제로 보는 것은 편향된 시각이다. 대일 무역수지 만성적자인 한국이 일본의 가마우지라면 대한 무역수지 만성적자인 중국은 한국의 가마우지란 말인가? 우리는 그동안 이웃인 소재·부품 강국 일본과의 경제협력을 통해서 한국 제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한·중·일 삼각무역 형태의 효율적 분업체제가 있었기에 동북아시아는 세계 최대 공장이 될 수 있었다. 한국과 일본은 경제협력으로 상호 이익을 보는 관계지 가마우지 경제관계가 아니다.

아베 정부가 수출규제 도발을 한 이유에 대해서 한국 반도체산업을 무너뜨리려는 경제침략이라든가 미·중 분쟁처럼 한국 경제가 더 이상 일본을 따라오지 못하게 견제하려는 통상마찰이라는 식의 어설픈 주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국제정치·외교와 일본 전문가들이 문제의 본질은 정치문제란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서 모든 걸 경제문제로 환원하는 어설픈 주장은 수그러들었다.

난 한국 대법원의 2012년 강제징용 판결과 2018년 최종 판결을 지지한다. 특히 2012년 판결은 용기 있는 대법관의 역사적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베 정부는 한국 측이 1965년 체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수출규제란 무리수를 통해서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너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경제도발을 하고 있다.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유무역 질서를 정면으로 훼손하는 명백한 도발행위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미국이 관세를 올려 수입을 제한하는 조치와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희토류 수출을 중단한 중국처럼 일본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언제든지 수출을 중단할 수 있는 나라라면 한국 경제의 안정을 위해서 경제적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전략품목의 대일 수입의존도를 최소화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당하더라도 외교 교섭을 계속하는 것과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국 대법원 판결 집행을 위한 일본 전범기업 자산 압류, 매각, 현금화로 한국에서 징용 피해자 배상 집행에 대한 법적 선례가 만들어지면 그것이 일본 기업의 불응에 따른 정당한 법 집행이지만 사실상 불가역적 상황으로 넘어간다. 일제의 불법적 강점으로 피해를 본 20만명 이상의 줄소송이 이어지고 법적 선례대로 강제 집행이 처리되면 일본 정부는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진다고 보는 듯하다. 아베 정부는 이런 전개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경제도발을 통해 한국에 경고한 것이다.

일본 정부가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 제외를 강행해도 되돌릴 수 있기에 국제법 위반의 경제도발이지만 루비콘강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 기업 자산 매각은 실행 후 돌이킬 수 없다. 루비콘강은 이탈리아 북부의 평범한 강이지만 카이사르가 넘는 순간 로마 역사는 바뀌었다. 일본 기업 자산 매각 집행 자체는 1965년 체제 변경의 본질이 아닐 수 있지만, 현 상황에서 루비콘강이다. 루비콘강을 건너는 순간 아베 정부는 경고대로 공격하고 전면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대법원 최종 판결이 정당하고 법 집행이 당연하지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에 징용 피해자 배상 집행 방식을 두고 한·일 간에 물밑 교섭을 해야 한다. 한국 정부의 선 보상, 일본 정부의 후 지급 등 다양한 타협 방식을 검토하자는 것이 비전문가의 무모한 말인가.

조영철 |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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