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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편집국에서] ‘강한 일본’과 공화국의 책무 /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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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재훈
24시팀장


일본은 패전 직후인 1947년 교육기본법을 제정했다. 그 전까지 일본은 메이지 일왕의 ‘교육칙어’에 기반한 국가였다. ‘신민의 충효’를 국체의 정신으로 규정했다. 이 정신을 받든 군국주의는 무수한 일본인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교육기본법은 이 ‘교육칙어’를 부정하고 개인의 존엄을 위한 교육을 강조했다. 평화헌법과 함께 ‘국가를 위해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위해 국가가 있다’는, 일본의 전후 체제를 만드는 핵심 뼈대가 됐다. 그러던 교육기본법이 2006년 12월15일, 59년 만에 개정됐다. 아베 신조가 처음 총리가 된 지 석달 만에 벌어진 일이다. 법 개정으로 국가는 교육기관을 통제할 정당성을 확보했다.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도덕 교육이 부활했다. 두달 뒤, 일본 최고재판소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말하며 기미가요의 피아노 반주를 거부한 공립학교 음악교사를 징계한 학교의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아베는 이후 곧 실각했다가 2012년 12월 다시 정권을 잡았다. 오는 24일이면 아베는 전후 최장수 총리가 된다. 긴 집권 기간 아베는 ‘개인을 위해 국가가 있다’는 일본의 전후 체제를 서서히 무너뜨렸다. 아베의 우경화 정치는 2000년대 이후 일본이 자부하던 ‘1억 총중류 사회’(1억명이 중산층인 사회)가 붕괴하면서 도래한 격차사회와도 조응한다. 일본은 점점 ‘승자 그룹’(가치구미)과 ‘패자 그룹’(마케구미)을 나누는 양극화 사회가 되고 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패자 그룹은 대체로 두가지를 선택한다. 정치와 성공 따위에 관심을 끊고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사토리(달관, 깨달음, 득도) 세대’가 되거나 자이니치(재일한국인 또는 조선적)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적대와 혐오로 현실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넷우익이 되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듯 지난달 21일 치러진 일본 참의원 선거는 전후 사상 두번째로 낮은 투표율(48.8%)을 기록했다. 냉소하거나 혹은 혐오하거나. 아베의 정치는 이 둘을 자양분 삼아 ‘강한 일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19년 한-일 관계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는 아베 정부의 한국 수출규제는 이런 흐름의 단면이다.

그런 ‘강한 일본’과 정면 대결이라도 펼치려는 걸까. 한국도 ‘강한 국가’가 되어 맞불을 놓고 있다. 그 흐름의 선두에 서 있는 곳은 역설적이게도 고용노동부다. 고용노동부는 일본의 수출규제 대상 품목의 국산화를 위한 연구개발이나 대체품목 도입을 위한 테스트 등의 업무에서 특별연장근로가 가능하도록 주 52시간제의 예외를 허용했다. 산업재해를 막기 위해 기업이 작성해야 하는 공정안전보고서와 유해·위험방지계획서의 심사·승인 기간을 단축했다. 안전인증 기간도 줄였다.

정부는 수급이 어려워진 물질에 대해 화학물질 취급시설 인허가나 기존 사업장의 영업허가 변경신청 심사 기간을 75일에서 30일로 줄였다. 더불어민주당은 한술 더 떠 2021년으로 예정된 주 52시간제 전면 시행 시기를 늦추고,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을 개정하자고 나섰다. 화평법은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계기로 제정됐고, 화관법은 2012년 5명의 목숨을 앗아간 구미 불산 가스 누출 사고 때 크게 개정됐다. 모두 정부가 앞장서 ‘개인을 위해 국가가 있다’는 민주사회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행태다. 한국 정부의 이런 자유주의적 움직임은 일본 정부의 지금과 얼마나 다른가.

일본 정부가 부정하고 있는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핵심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이춘식 할아버지 등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적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판단이다. 이는 곧 국가는 개인의 존엄을 거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국 정부는 이 거래할 수 없는 개인의 존엄을, 일본 정부도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에 모순을 없애고 일본 정부의 지금을 극복하려면, 국가는 더 이상 경제 위기를 빌미로 개인을 위험에 내몰아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선 안 된다. 그것이 바로 군주국과는 다른 공화국의 엄중한 책무다.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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