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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다섯 줄’만 넘어가도 읽기 힘들어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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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ㅣ문해력, 왜 중요한가



‘북튜버’가 대신 읽어주는 책보다는

아이 손으로 직접 종이책 만져보고

소리 내어 읽어봐야 문해력 높아져

아동기 발달의 관점에서

초등 2학년 전에 획득돼야…

“문해력은 사고방식 좌우하는 능력”


한겨레

지난 7월 7일 서울의 한 중고서점에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책을 고른 뒤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 문해력은 수능 등 대입 시험뿐 아니라 아이들이 졸업 뒤 ’평생 독자’로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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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대신 책을 읽어주는 ‘북튜버’ 채널도 있고, 글자를 긁으면 알려주는 펜도 있는데 굳이 왜 내가 직접 읽어야 하나요?”

경북 포항에서 근무하는 한 초등학교 교사가 읽기 수업을 진행하다 학생에게 들은 말이다. 책을 소개하고 내용까지 정리해주는 북튜버(Book+Youtuber) 채널이 많은데 왜 자신이 직접 ‘힘들게’ 글을 읽고 내용을 이해해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눈과 머리로 읽는 것보다 손끝 터치와 귀로 듣는 소리가 더 빠르고 간편하며, 머리도 안 아프다는 말이었다.

서울 용산구에 사는 학부모 최아무개씨도 최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가 글자 수도 많지 않은 동화책 읽기를 버거워하기 때문이다. 다섯 줄 이상 넘어가면 책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여 학습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을지 고민이 많다.

■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자

한국 학생들의 문해력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만 15살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읽기 영역에서 한국은 2006년 기준 세계 1위를 차지했는데, 2015년 이후에는 9위까지 떨어졌다.

특히 최근 발표된 결과를 보면, 교과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독해력 수준이 낮은 학생들이 전체의 32.9%에 이르렀다. 의약품 설명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문해가 매우 취약한 수준’의 비율 역시 미국이 23.7%, 핀란드 12.6%, 스웨덴 6.2%인 데 반해 한국은 3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오이시디) 국가 가운데 하위권을 차지했다. 엄훈 교수(청주교대 문해력지원센터장)에 따르면 현재 초등학교 입학생 기준으로 전체의 20%가 ‘문해력 낮음’에 해당한다.

“문해력은 텍스트를 이해하고 평가한 뒤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문해력은 단순히 단어와 문장을 해독하는 것을 넘어 복잡한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능력까지 모두 아우른다.”

오이시디는 문해력을 이렇게 정의한다. 쉽게 말해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문해력이란 인간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좌우하는 능력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문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인간답게 살기 어렵다. 문해력이 떨어지면 디지털 및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각종 디지털 기기 조작 과정과 원리를 이해하는 데서 어려움을 겪다 보면 유용한 지식과 최신 정보 습득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문해력 교육이 안 되어 있으면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실패를 경험한다. ‘초기 문해력’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초기 문해력은 본래 ‘초기 아동기 문해력’의 줄임말로, 출생 직후부터 만 8살까지 발달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문해력을 아동 발달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문해력은 차근차근 나이 들수록 쌓여가는 게 아니라, 아동기에 반드시 획득해야 하는 능력이라는 말이다. 엄훈 교수는 “초등 2학년 이전에 초기 문해력이 완성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겨레

지난 9일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 놓인 EBS 수능 문제집과 학습 서적. 문해력은 수능 등 대입 시험뿐 아니라 아이들이 졸업 뒤 ’평생 독자’로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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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가 아이의 세계를 좌우한다

문해력은 일반적으로 독서율과 상관관계가 있다. 독서율이 높은 사람일수록 문해력 역시 높다. 문해력을 키우려면 평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자주 읽고,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실제 책을 읽어내는 독서율뿐 아니라, 아이들 눈에 보이는 환경도 중요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책 많은 집에서 자란 아이가 문해력과 수리력이 높다. 단지 책을 집 안 가득 쌓아 놓는 것만으로도 자녀의 지적 능력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와 미국 네바다대 연구진이 오이시디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어린 시절 집에 책이 많이 있는 분위기에서 자란 성인이 문해력과 수리력, 컴퓨터 활용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오이시디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의 2011~2015년 데이터를 바탕으로 31개국 성인 남녀 16만명의 언어, 수학, 컴퓨터 조작 능력을 조사했다.

이 조사를 통해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더라도 책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자란 십대들은 책이 별로 없는 환경에서 자란 대학 졸업생만큼이나 지적 수준이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 번 실패를 경험하면 자신감이 떨어져 계속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문해력 교육 특성을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종이책을 자주 접하는 게 아이들 학습과 문해력 발달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초등학교 1~2학년까지는 부모의 가치관, 직업, 가족 구성원의 말하기 습관을 비롯해 거주 지역의 분위기에 따라 어휘력 차이가 발생한다. 어휘력의 차이는 문해력 수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초등학교 3~4학년이 되면 환경보다는 자신의 독서량과 읽은 책 종류에 영향을 받는다. 독서량이 많은 아이는 다양한 어휘를 이해하게 되고, 읽은 책에 따라 쓰는 단어가 달라진다.

책을 읽을 때 아이가 접하는 어휘는 자연스레 학습되는데, 이때 학습된 어휘는 두뇌와 의식 속에 자리잡는다. 아이가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돼 있는 단어만큼만 글을 이해하고, 느끼고, 행동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 문해력 키우기는 공교육이 담당해야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문해력이 점점 낮아지는 근거로 삼았던 건 국제학업성취도평가였다. 문해력 전문가들은 이 평가 결과가 점점 나빠지는 경우에는 먼저 공교육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교육에서 한글 교육을 소홀히 한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초등 입학 전 ‘한글은 떼고 가야 한다’는 게 부모들의 원칙처럼 굳어졌다. 한글 지도와 문해력 교육을 사교육 시장에서 담당하면서 그 규모도 팽창을 거듭했다. 문자·문해력 키우기에서 발음·의미 중심 지도법 등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도 오히려 사교육 업체들이다. 종이책이 외면받는 스마트폰과 유튜브의 시대라 할지라도 이런 급격한 사회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한 공교육 시스템이 절실히 필요하다.

학부모를 비롯한 양육자에게 아무리 ‘문해력 키우기’를 강조해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가정환경에 놓인 아이들을 실제 교육하기는 어렵다. 취약 가정 학생들을 제대로 돕고 이끌 수 있는 건 공교육이라는 이야기다.

중학교 교사였던 엄 교수는 자신의 책 <학교 속의 문맹자들>에서 초등학교 때 읽기 부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아이들은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읽기를 못하는 상태로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이런 문제가 지속되는 이유로 현재의 교육과정이 ‘동일한 출발점 가설’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학생들은 애초에 동일한 출발선에 설 수가 없는데, 공교육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수준에서 시작한다는 전제를 놓은 뒤 교육과정을 만들고 그 교육과정에서 낙오하는 아이들에 대한 구제책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편 뉴질랜드에서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만 6살에 모든 아이들을 대상으로 언어능력 진단평가를 실시한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선별된 아이들은 12주에서 최대 20주까지, 매일 30분씩 교사와의 일대일 수업(개별화 교육)을 통해 읽기 능력을 바로잡게 된다.

이런 프로그램은 영어권의 초기 문해력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친 마리 클레이 덕분에 지속적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미국으로도 건너가 공교육 현장에 자리잡았다. 미국 역시 ‘리딩 퍼스트’라는 문해력 프로그램을 연방정부의 예산 지원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아이들이 알파벳을 익히는 것 외에 글 내용을 이해하도록 문해력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역시 최근 각 시도교육청에서 ‘한글 책임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이다. 7차 교육과정이 시작된 2000년 이후 공교육 현장에서 한글 교육이 매우 소홀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문해력 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을 특히 강조한다. 문해력이 낮은 아이들이 자기 눈높이에 맞춘 책을 읽고 이해하며 성공의 경험을 해보는 게 중요한데, 이때 교육적으로 조기 개입할 수 있는 의무와 권리는 교육 전문가인 교사에게 있다는 것이다.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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