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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ESC] 42살, 사랑받고 싶다는 꿈, 그저 꿈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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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은의 단호한 러브 클리닉

Q 사랑에 환상을 품은 42살의 나

결혼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져

채울 수 없는 허한 감정,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사랑받는 것’이 유일한 행복의 실현일까?

인생의 안정감은 사회적 시스템이 주지 않아

동화에서 나와 자신을 돌봐야 채워질 것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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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Q 요즘 고민이 많고, 앞으로 바꿔야 할 부분이라 생각해 답답한 마음을 안고 사연을 적게 됐습니다.

저는 사랑에 관한 환상이 많았어요. 어릴 적부터 영화, 드라마를 좋아해 많이 봐서 자연스럽게 환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평소 상상하는 걸 즐기는 스타일이다 보니 비현실적인 환상에 익숙해졌는데, 그런 환상과 상상이 저의 방어기제들이었나 싶기도 해요. 올해로 42살이 된 지금에서야 제가 사랑을 하기에는 어려운 사람이란 걸 하나씩 하나씩 아프게 깨닫고 있습니다.

40살이 되면서 자신에 대해 깊이 알게 되는 순간들이 많아서 좋기도 했어요. 그런데 다른 면도 있습니다. 지난날의 못난 자아들이 떼를 지어 다가오곤 합니다. 이게 트라우마로 다가오는 때가 잦아요. 자라온 환경 탓에 자존감을 높이기가 너무 어려웠고, 자신감 없이 살아가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렇게 산 지 40년이 넘다 보니 더는 참아내기가 힘든 2019년 7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름 노력해 다양한 활동에 도전하면서도 결국 마지막에는 낮은 자존감을 내비치는 행동을 할 때마다 낙심하게 돼요. 이번 생애는 여기까지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냅니다. 어떤 원인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게 힘든 사람이 되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하게 되네요.

생각이 많다 보니 누군가를 좋아해도 헤어질 결말을 먼저 생각해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따져가면서 결정하다 보니 마음 놓고 누군가를 좋아해 본지도 오래됐습니다. 용기 내고 싶어도 이젠 나이 탓, 형편 탓을 하면서 본능적으로 밀어내곤 해요. 저만의 매력이 분명 있고 지인들에게도 ‘왜 남자친구가 없어?’, ‘결혼을 못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요즘은 이런 이야기 듣기도 힘듭니다. 나한테 문제가 아주 많은 것 같아서요.

게다가 상대를 배려하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 나쁜 남자를 만나도 저는 배려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동안 힘들게 살았으니 그 시간을 보상받듯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저한테는 허락되지 않는 운명인 건가 싶어요.

정말 저는 꿈도 많고 여전히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그 힘으로 버텼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나의 반쪽을 만나면 잘 해주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사랑받으면서 살고 싶어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결혼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지긴 하네요.

무엇을 해도 허한 이 기분을 앞으로 지혜롭게 잘 채워나갈 수 있을까요? 42살의 저,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42살, 여전히 사랑을 꿈꾸는 사람

A 환상, 비현실적, 상상, 운명, 꿈… 이 단어들을 한 번 소리 내 읽어 보시겠어요. 당신이 반복적으로 기술한 단어들입니다. 공상과학(SF) 영화나 놀이공원 홍보 문구에서 자주 보는 단어들이, 당신의 인생을 기술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죠. 당신의 몸은 현실을 살고 있지만, 당신의 마음과 자아는 현실이 아니라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 같아요. 하나하나 풀어가 보겠습니다.

어렸을 때 다소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고, 사랑에 대한 환상도 많이 갖고 있었다고 하셨네요. 아이를 지나치게 방임하거나 차별, 학대하는 부모에게서 양육될 경우, 그 아이는 커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려서 받지 못했던 관심과 인정을 성인이 돼서 갈구하기에, 이른바 ‘반복 강박’ 상태에 빠지고, 이 경우 오히려 자신에게 해로운 사람에게 급속도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죠. 어려서부터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했다면, 그 역시 당신에게는 좋지 않은 영향으로 남았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영화나 드라마 속 사랑은 ‘그리하여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까지거든요. 캔디, 신데렐라, 백설 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어렸을 때 당신이 보았을 스토리는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여성 캐릭터가 고초를 겪어내고, 있다 보면 별안간 멋진 왕자님이 나타나 비로소 그 여성 캐릭터가 완전한 행복으로 골인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나도 혼자서는 불완전하고, 멋진 남자를 만나야 행복해지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이런 상황에선 굉장히 자연스러운 결론이죠.

여성의 자존감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너는 여자애가 왜 이렇게 퉁명스럽니?’ ‘여자애가 좀 다소곳하고 공손한 맛이 있어야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참 많이 들었는데 말이죠. ‘여자는 태도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스며들어, ‘아무래도 남의 기분을 그르치지 않도록 내가 참는 게 낫겠어’라는 삶의 태도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만족보다는 남의 만족을 먼저 생각하고,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게 중요한 메시지가 되는 거죠. 내가 만나고 있는 남자가 나쁜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람을 배려하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불만을 말하는 순간 상대방이 불쾌해진다는 것을 아니까, 불만을 말하기는커녕 배려의 아이콘이 되는 쪽을 택할 수밖에요. 하지만 그래서 그 사람이 고마워하던가요? 아마 결국 당신에게 상처만 더 주고 떠나갔을 걸요? 그 결과 당신은 더 스스로 확신이 없어지고, 자신을 탓하게 되었을 겁니다. 악순환이죠.

사실 당신이 털어놓은 고민은 굉장히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많은 여성이 당신과 비슷한 고민의 지점에 있답니다. 완벽한 양육 환경을 제공하는 부모 자체가 흔치 않고, 오랫동안 가부장제 문화가 지배해온 한국에서 ‘여자가 이래야지’라는 메시지를 듣지 않고 성장한 여성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러나 이 고민을 해결하고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 단지 ‘운명의 반쪽을 만나서 평범하게 사랑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바로 이 생각이야말로 당신의 발목을 붙잡는 것임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기억하세요, 인생의 안정감은 타인이나 사회적 시스템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불안과 갈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내가 내 인생을 온전히 책임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안정감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할 사람만 내 인생에 허락하겠다고 다짐할 수 있어야 내가 아닌 타인과도 안정적인 사랑,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함께하게 되는 것이죠. 이제 그만 동화 속에서 빠져나오세요. 개인의 성취와 건강, 내면을 돌보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세요. 인생의 공허함은 남자가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관리할 때 비로소 채워지는 것이랍니다.

한겨레

곽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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