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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토)

1910년 8월15일, 순종은 뭘하고 있었을까?…친척들 '작위'만 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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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친척들에게 작위 나눠주기 바빠... 은사금 챙겨

일제는 발빠르게 병탄준비, 외교전도 치밀하게 나서

아시아경제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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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완흥군(完興君) 이재면(李載冕)은 황실 의친(懿親)으로 처지가 특별하니 응당 진봉(進封)의 거조(擧措)가 있어야 할 것이다. 특별히 흥왕(興王)으로 봉(封)하고 완흥군부인 이씨(李氏)는 흥왕비(興王妃)에 봉하라."


일제강점기 작성돼 정식 조선왕조실록으로 인정은 못받지만, 실제 조선왕조실록의 마지막 부분인 순종실록에는 한일병탄조약 체결 일주일을 앞둔 1910년 8월15일 고종의 친형인 완흥군 이재면을 흥왕에 봉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과 2주 뒤인 8월29일 한일병탄조약이 공포되면서 이재면은 왕에서 바로 공(公)으로 강등됐지만, 일제의 고위귀족인 공작으로서 많은 은사금을 받을 수 있었다.


원래 이재면은 흥선대원군 생전에 순종의 아버지, 고종을 밀어내기 위해 수차 쿠데타를 꾸미다가 고종에 의해 조정에서 완전히 내쳐진 인물이었다. 생계가 위협받을 지경에 처한 그에게 벼슬을 내린 것은 순종이었다. 순종은 그 뿐만 아니라 1907년 제위가 시작된 이후부터 온갖 왕족들, 친족들에게 벼슬과 훈장을 내렸다. 이때 받은 벼슬은 나라가 망하면서 한등급씩 깎였지만, 이 벼슬 덕분에 모두 일제에 의해 이른바 합병위로금이라 불렸던 일왕의 은사금을 받게 됐다. 망국을 코앞에 두고 일족들만 챙긴 셈이다.


순종이 이렇게 친척들과 지인들이 막판에 은사금을 받을 수 있도록 훈장을 내리는 사이, 일제는 매우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재면이 왕이 된 1910년 8월15일, 병탄조약 초안을 마무리했고 다음날인 8월16일, 당시 조선통감인 데라우치는 이완용과 조중응을 통감관저로 불러 이 초안을 보여주고 수락을 얻어냈으며 8월18일에는 내각회의에서 합의를 봤다. 그리고 곧바로 8월22일 순종 앞에서 어전회의를 개최해 강제로 결의케 하고, 일주일 뒤인 8월29일 공포했다.


일제는 외교부문에서도 재빨리 움직였다. 8월17일 병탄조약 초안을 각국 공관으로 보냈다. 열강들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을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조선왕조가 일전에 체결한 치외법권 등의 불평등 조항이 병탄으로 인해 소멸될 것에 대해 불만들을 가진 상태였다. 일제는 이에 대한 대비로 1907년 프랑스와의 프·일 조약을 시작으로 러시아, 미국 등 열강들과 후속 협상을 벌였다.


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러시아와의 마지막 협상을 마무리지으러 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사건이었다. 이 일로 1909년 7월 이미 내각회의에서 한일병탄을 획책했던 일제의 계획은 이듬해로 밀려난다. 일제는 1910년 3월26일 안 의사를 처형해 사건을 종식시킨 후, 5월30일 육군대신 데라우치를 3대 통감으로 임명시켜 일본군 2개사단과 헌병 4000여명을 동원해 한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일체의 집회 및 정치활동을 못하도록 통제했다. 이런 상황에서 1910년 8월29일 병탄조약이 공포됐기에 을사조약 공포 때와 달리 조야가 조용히 흘러갔다.


하지만 독립운동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내 의병들은 국외로 이동해 투쟁을 이어나갔고, 9년 뒤인 3.1운동을 위시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황제는 나라를 완전히 포기하고 일가친척들의 안위만 챙기고 있을 때도 국내외 독립지사들은 35년 뒤 찾아올 1945년 8월15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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