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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조선시대, 일하는 여성 공무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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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남장’하지 않고 들어간 ‘금녀의 영역’, ‘여사’ 제도 소재로 한 <신입사관 구해령>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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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국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무엇일까? 애증으로 얽힌 동료이자 경쟁자였고 친구가 된 세 여성이 차를 몰고 탁 트인 도로를 달려나가던 tvN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의 마지막 장면을 물론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일과 함께 살아왔고 일을 지배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이어 등장한 것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다.

MBC <신입사관 구해령>(이하 <구해령>)의 3화 오프닝, 조선 최초의 ‘여사’(여성 사관) 별시를 치르기 위해 여성 수십 명이 과거 시험장을 가득 메운다. 혼사가 깨지기를 기다렸다 혼례복을 벗어던지고 담장을 넘어 한달음에 달려온 구해령(신세경)은 상기된 얼굴로 붓을 잡는다.

정쟁 결과 탄생한 ‘성별 할당제’



19세기 초, “남편을 모시고 식사할 때는 밥을 많이 먹지 말고 조금씩 먹되 빨리 삼키고” 따위의 신부수업을 억지로 받는 반가(양반 집안)의 여식 해령에겐 혼인하지 않고 살아갈 자유조차 없다. “여인은 나쁜 일도 훌륭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시경>의 가르침이 지당한 것이듯, 해령의 총명함은 애써 감추지 않으면 교만하다 질책받는 악덕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중종에게 여사 제도 도입을 제안했던 동지사 김안국과 임금의 대화에서 흥미로운 가정을 떠올린 김호수 작가는, 남성들이 장악하던 조정의 행정 시스템에 여성이 진입할 수 있도록 상상력의 작은 물꼬를 튼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제도가 순수한 선의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좌의정 민익평(최덕문)은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는 세자(박기웅)와 대비(김여진)를 감시하기 위해 천년도 더 전에 사라진 주나라의 옛 제도를 끌어들이고, 그 속내를 눈치챈 세자는 크게 반발한다. “어찌 언문으로 사필을 잡을 수 있느냐”며 반대하는 쪽도, “여사는 사관과 달리 궁중의 일상생활을 보고 적기만 하면 된다”며 찬성하는 쪽도 여성의 지성을 믿지 않고 깎아내리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구해령>의 여사 제도는 비록 정쟁 결과로 탄생한 일종의 ‘성별 할당제’지만, 이 설정은 그동안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린다.

SBS <바람의 화원>이나 KBS <성균관 스캔들> 등 기존 사극에서 ‘금녀의 영역’에 들어가려는 여성은 남장을 하고서야 그 세계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령과 함께 별시에 합격한 예문관 권지(요즘 말로 인턴, 또는 공채 합격 후 수습 기간을 보내는 신입사원)들은 이 세계에서 여성인 채로 남성 사회에 ‘합법적으로’ 진입한 최초의 여성들이고, 그로 인해 견고한 벽에 부딪힌다.

세자조차 생각지 못한 여성의 성취



비성균관 출신인 여사들에게 “방 안에서 자수나 놓던 것들”이라며 무시하는 예문관 한림들, “국정을 논하는 곳에 여인이라니! 대전을 더럽혀도 유분수”라며 쫓아내려는 당상관들은 여성이 사회 진출을 시작했을 때, 특히 군인이나 경찰 등 남초 직군에 진입할 때 늘 가해진 차별과 배제를 보여준다. 여사들은 사관이기 전에 여성이라는 ‘한계’를 끊임없이 주입받고, 조직 내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해령은 옳은 일을 해도 지지받기는커녕 “폐나 끼치는 계집년”이라며 약한 입지를 공격당한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여성 헬기 조종사가 될 만큼 탁월한 경력을 쌓으면서도 군대 내 성폭력, 성차별에 계속 맞서야 했던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의 말은 <구해령>이 비추는 과거의 가상 세계가 현재의 현실 세계와 멀지 않게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군인이 되고자 스스로 지원했지만 지내오면서 언제나 더 힘들었던 것은 군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나 훈련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인식을 뛰어넘는 일이었다.”(2006년 <신동아> 인터뷰)

차별과 불평등이 만연한 세계에서 해령이 예문관의 유일한 여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남성 위주 시스템에 여성이 들어가 균열을 낼 때, 한 여성이 특별하고 유능한 단독자로서 있는 것보다 다양한 여성이 한꺼번에 존재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다. 한 성별이 집단 안에서 보편적 존재로, 눈에 띄지 않고 차별이나 특혜를 받지 않으려면 최소 30%의 인원을 차지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듯, 극 중에서 이름을 가진 예문관 소속 인물 12명 중 여성은 4명이고 이들은 각기 다른 성격과 욕망을 가진다.

이를테면 이조정랑의 딸 송사희(박지현)는 여성 주인공의 흔한 ‘라이벌’이 그러했듯 탐욕과 질투심을 숨기지 못해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내는 캐릭터가 아니라, 냉철하고 품위 있으며 해령과 다른 방향으로 사회화한 인물이다. 그는 부유한 반가의 딸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 세자에게 아비의 권세와 재산은 여성인 자신의 몫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여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때 그동안 힘없고 가난한 백성의 처지를 헤아려온 세자조차 여성이 ‘평탄한 삶’ 대신 자신만의 성취를 원할 수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지 못한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이처럼 과거를 배경으로 현재를 비추고 미래의 가능성을 그려나가는 <구해령>은 여성이 사회적 역할을 하기 위해 ‘명예 남성’이 되는 대신, 존재 자체로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요구하고 투쟁해온 역사와 시대적 변화가 담긴 작품이다.

로맨스의 결론은 ‘혼인’이 될까



해령과 로맨스 관계를 이루는 도원대군 이림(차은우)이 여성에게 인기 있는 염정소설(연애소설) 작가이면서 흔히 남성의 덕목으로 여겨진 완력이나 궁술 실력은 형편없고, 그보다 여섯 살 연상의 해령이 궁술로나 학식으로나 사회 경험으로나 이림을 압도한다는 점도 흥미로운 뒤집기다. 그러니 두 사람의 로맨스가 꼭 ‘혼인’으로 귀결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물론 극 초반 해령이 읽어주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끝까지 듣고 “여태 둘이 이루어지지도 않는 걸 읽고 있었단 말이야?”라며 타박하던 손님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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