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8 (일)

"올해 신입 버스기사 90%가 '초보'"…주 52시간제가 부른 인력난에 승객 안전도 '빨간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주 52시간제 앞두고 버스회사들 인력 확보 비상
"올해 신입기사 90%가 경력 1년 안 된 초보"
수습 교육도 없이 운행 투입…급정거 등 사소한 사고 20% 늘어
정부·지자체 "안전교육 대책 세울 것"
업계 "주 52시간제 근본 대책 없이 승객 안전 위협"

경기도 시흥에 사는 김모(여·62)씨는 얼마 전 서울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영등포역까지 가는 A회사 버스를 타고 나가던 중에 깜짝 놀랐다. 버스 기사가 갑자기 차를 멈춰 세워 승객들이 다칠 뻔한 것이다. 김씨는 자리에 앉아 있어 괜찮았지만 서 있던 젊은 남자 승객은 몸이 크게 앞으로 쏠렸다. 급정거한 버스 기사는 "미안합니다.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익숙하지가 않네요"라며 뒤돌아 멋쩍게 웃었다. 김씨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지난 달 경기도 의정부 한 도로에서 시내버스끼리 추돌사고가 나 버스 앞부분이 심하게 파손됐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는 관계없음>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는 10월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본격 적용되는 300인 이상 버스 회사들이 버스 기사 인력난에 시달리면서 ‘초보 기사’를 대거 뽑고 있는 것으로 18일 알려졌다. 버스업계에선 제대로 된 안전 교육조차 받지 않은 신입 기사들을 버스 운행에 긴급 투입할 수밖에 없어 승객 안전이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버스 업계에선 지난 7월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됐지만 버스 회사들이 인력 충원에 부담을 느끼자 정부가 3개월간 처벌 유예기간을 둬 오는 10월부터 본격 적용된다.

◇주 52시간제에 버스 기사 인력난… "올해 신규 채용 90%가 1년 미만 ‘초보기사’"
김씨가 탔던 경기 지역 A 버스 회사의 직원은 작년 말 기준으로 480여 명이었다. 지난 7월부터 주 52시간제 적용이 예고되자 버스 기사가 부족했던 A사는 올해 들어 7월까지 120여 명을 추가로 채용했다. A사에 따르면 올해 뽑은 버스기사 중 약 90%가 과거 버스 운전 경험이 없거나 1년 미만인 ‘초보 기사’였다. 베테랑 기사를 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경험이 부족한 초보 기사들을 대거 채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A사는 9월 말까지 버스기사 80여 명을 추가로 고용해야 한다.

A사 관계자는 "사람을 뽑아야 해서 뽑고는 있지만 신입 기사가 너무 많아져 걱정"이라며 "큰 사고는 없었지만 급정거로 승객이 넘어지는 등 자잘한 사고가 올 상반기에만 100여 건에 달했는데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약 20% 늘어난 수치"라고 했다.

버스기사 채용을 급격히 늘려야 하는 전국 버스 회사는 대부분 A사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 주 52시간제가 적용되는 300인 이상 버스 회사 전국 31곳 가운데 21곳이 몰려 있는 경기도가 특히 심각하다. 경기도 관계자는 "지역 내 300인 이상 버스 회사들이 지난 7월까지 1500여 명을 추가 채용했지만 아직 1000여 명의 기사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무경력자나 사고 이력자 등을 뽑는 ‘묻지마 채용’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마을버스 경력 1년 이상은 돼야 노선버스 기사로 채용됐는데 최근엔 버스를 몰 수 있는 대형 운전면허증만 갖고 있으면 버스 운전 경력이 없어도 기사로 채용되고 있다"며 "예전에 사고를 내서 해고됐던 기사가 다른 회사에 재채용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경기도의 경우 ‘베테랑 기사’가 대우나 근무 환경이 좋은 서울로 이직하고 있는 점도 인력난이 가중되는 배경으로 꼽힌다.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관계자는 "서울 쪽에 자리가 나면 경기도의 경력 버스 기사들은 바로 자리를 옮겨 버리고 빈자리를 신입 기사가 채운다"며 "처우나 임금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인력난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 한 달 ‘수습 교육’도 사라져...일주일 만에 실전 투입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심각한 버스 회사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채용박람회 등을 열었지만 성과는 크지 않다는 게 업계 얘기다. 경기도는 지난 6월 버스기사 채용박람회를 열었다.

조선일보

지난 13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제2회 경기도 버스 승무사원 채용박람회에서 참가자들이 설문지를 작성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당시 ‘버스 승무사원 채용박람회’엔 1300여 명이 방문했다. 하지만 이중 실제 버스회사에 이력서를 낸 사람은 3분의 1 수준인 380여 명(중복 포함)뿐이었다. 경기도 B 버스 회사가 1차 채용박람회를 통해 실제 고용한 버스 기사는 10여 명에 불과했다. 결국 경기도는 두 달 만인 지난 13~14일 2차 채용박람회를 개최했다. B사 관계자는 "1, 2차 채용박람회로 20여 명을 고용했다"며 "채용박람회가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주 52시간제를 맞추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인력을 충당하기엔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했다.

주 52시간제로 촉발된 버스 기사 인력난은 부실한 신입 교육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 C 버스 회사의 경우 과거엔 신입 기사를 뽑으면 한 달 정도 ‘수습기간’을 뒀다. 베테랑 기사의 버스에 함께 타 노선을 익히고, 시간대별 교통상황도 살피는 ‘1대 1 교육’도 받았다. 이 교육이 끝나면 마을버스 등으로 연습 운행도 하고, 회사 자체 안전 교육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1대 1 교육’은 커녕,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실전에 투입되는 일도 잦다고 한다. C사 관계자는 "2000년대 초반부터 ‘1대 1 교육’ 등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했지만, 요즘에는 그런 교육을 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신입 기사가 대거 늘어났다는 점은 알고 있다"며 "교통 안전 체험 교육과 같은 대책 등은 곧 세울 계획"이라고 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도 "바로 노선에 투입할 수 없는 신입 기사가 대거 채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안전 교육 등과 관련해 신입 기사 현황 등을 파악해 문제가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업계에선 버스 업종을 주 52시간제 특례 업종으로 다시 분류해 버스업계에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지역에 따라 상황이 다른데, 정부가 일괄적으로 주 52시간제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버스 업계 관계자는 "주 52시간제를 지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는 등 근본 대책이 없다면 인력 충원을 위해 대거 뽑힌 신입 기사들이 승객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진우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