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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김학균의 금융의 속살]기관투자가들이 ‘마이너스 채권’을 사들이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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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스위스 마이너스 1.16%, 독일 마이너스 0.71%, 프랑스 마이너스 0.44%, 일본 마이너스 0.23%. 지난주 서구 선진국들의 10년만기 국채 금리이다. 금리가 마이너스라니? 특히 장기간 돈을 묶어둬야 하는 장기채권 금리가 마이너스라는 건 상식에 반하는 일이다. 채권을 발행해 돈을 빌리는 국가가 오히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경제주체가 만기에 투자원금보다 적은 금액을 돌려받는 채권을 사는 꼴이다. 비정상도 이런 비정상이 없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경제학의 상식으로 해석해보면 경제주체들의 디플레이션 기대 심리가 커질 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디플레이션은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다. 다르게 말하면 디플레이션 세상에서는 돈의 상대적 가치가 높아진다. 2000년대 초 일본의 예를 돌아보자. 당시 일본의 예금 금리는 이미 제로 수준이었다. 은행에 예금을 해도 거의 이자를 받을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은행에 돈을 맡겼다.

당시 일본 경제는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에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 1%대를 기록하는 일은 흔했는데, 예금자 입장에서는 은행에서 이자를 받지 않고 원금만 찾더라도 물가가 하락함으로써 화폐의 실질 구매력을 높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보관하면 분실과 멸실의 위험이 존재하기에 디플레이션 세상에서는 원금만 돌려받을 수 있다면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이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다.

요즘에도 물가가 금리의 마이너스 폭보다 더 크게 하락하면 마이너스 금리 채권 투자가 정당화될 수 있다. 디플레이션 시대의 도래를 우려하는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채권 금리 마이너스 국가들 중 물가가 하락하는 나라는 없다. 1% 미만의 낮은 물가상승률이지만 그래도 물가는 오르고 있다.

최근의 마이너스 금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마이너스 금리에도 채권을 사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아무리 독일과 일본 국채가 안전자산이라고 할지라도 개인투자자가 원금도 돌려받지 못하는 마이너스 금리 채권을 살 리는 없다. 포트폴리오에 채권을 꼭 채워놓아야 할 기관투자가들이 채권을 사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더라도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웃돈을 주면서까지 채권을 사는 행동은 좀 이상하다.

기관투자가들이 믿고 있는 언덕은 ‘중앙은행’일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제로금리 정책을 넘어 양적완화를 통해 유동성을 쏟아부었다. 또 최근에도 중앙은행가들은 경기둔화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 금리를 제때 낮추지 않고 있다며 중앙은행을 압박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중앙은행 의존증은 중증이다.

마이너스 채권을 사는 투자자들에게는 비록 웃돈을 주고 채권을 사지만, 중앙은행이 더 큰 웃돈을 받고 팔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을 것이다. 아니면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그랬던 것처럼 중앙은행이 더 비싼 가격에 직접 사주든가. 시장의 정책 의존증은 매우 심각하다.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국채뿐만 아니라 일본의 주식까지 사들이면서 자산 규모가 GDP를 넘어섰다. 이런 자본주의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다. 교과서가 늘 정답은 아니지만 이렇게 지탱되는 시스템이 얼마나 지속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김학균 |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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