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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엄마가 지구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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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마음 키우기】

사춘기를 맞이한 6학년 경수(가명)가 있었다. 경수는 고학년이 되면서 욕을 달고 살았다. 거의 모든 말을 ‘씨○’ 하고 시작했다. 쉬는 시간, 수업시간, 담임이 있든 없든 한결같았다. 하루라도 경수의 욕을 듣지 않으면 되레 이상했다.

국어 시간이었다. 이상했다. 폭풍 전 고요 같았다. 나는 수업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집중을 잘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뭔가 달랐다. 잠시 뒤 알게 되었다. 경수가 조용했던 거다. 이미 욕 한판 던질 시간이 지났음에도 경수는 말없이 국어책에 무언가 적고 있었다.

쓰기 시간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적고 있을 필요가 없었지만 손가락에 힘주며 쓰고 있었다. 궁금했다. 우리 경수가 무슨 일로 이토록 열심히 적고 있는지. 천천히 경수 쪽으로 다가갔다. 입으로는 국어 수업을 하고 있었지만, 발걸음은 경수를 향했다. 두 발 정도 가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국어책을 확 덮어 버렸다. 대한민국 초등교사의 권위가 이전보다 못하다 해도, 아직은 살아 있다. 수업 중 딴짓이냐며 책을 빼앗아 볼 수 있었지만 모르는 척 지나갔다. 그때 책을 가져가 보는 순간 경수와 나는, 남은 기간 라포르(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 아쉽지만 기다려야 했다.

음악 시간이 되었다. 요즘은 음악, 미술, 체육 전담 선생님이 따로 있다. 아이들을 음악실에 보내놓고 교실로 돌아왔다. 빈 교실, 경건한 맘으로 경수 책상 앞에 섰다. 미안하지만 알아야 했다. 서랍에서 국어책을 꺼내 펼쳐보았다. ‘씨○○, 개○○’…. 욕들이 한가득 적혀 있었다. 별일 아니었다. 내가 군대 생활하는 동안 했던 욕 수준의 평범한 말들이었다. 책을 덮는데, 뭔가 이상했다. ‘왜 힘들게 국어책에 욕을 쓰고 있었지?’ 그냥 평소처럼 말로 하면 되는 것을 경수는 힘들게 적어 놓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다시 국어책을 꺼내 다음 장을 넘겼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엄마가 지구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다행이었다. 혼자 생각했다. ‘선생님이 지구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쓰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아직 나에겐 기회가 있다.’

몇 개월 뒤, 경수가 면담을 신청했다. 친구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면담이 끝날 즈음 넌지시 엄마에 대해 물었다. 경수는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엄마에 대한 온갖 비리(?)를 쏟아냈다. 요지는 간단했다. 엄마랑 자주 싸우는데 한 번도 이긴 적 없어 화가 난다는 거였다. 자기가 옳은 건데도 진다고 했다. 더 대들면 휴대폰을 압수한다는 거였다. 그러면 자기는 지는 거라 했다.

경수에게 얘기해주었다. 싸우지 말고 그냥 방으로 가라고, 싸우지 않으면 지는 일도 없을 거라고, 그리고 3년만 버티라 했다. 중3이 되면 편의점에 가서 고등학생이라 속이고 알바를 시작하라 알려주었다. 4년 동안 열심히 모아, 고등학교 졸업하면 원룸 보증금 정도는 될 테니 나가 살아라 했다. 경수가 정말 그래도 되냐고 했고, 나는 그래도 된다 했다. 시간이 지나 경수는 대학생이 되었고, 아직도 엄마 집에 산다.

자존감은 유년기 애착을 통해 시작되고 사춘기 분리를 통해 완성된다. 최종 목적지는 독립이다. 사춘기 자녀와 싸워서 이기려 하지 말자. 잘못하면 지구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김선호 서울 유석초등학교 교사, <초등 자존감의 힘> 저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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