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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히어로도 인생역전도 없지만 현실에 굴하랴, 유쾌한 드롭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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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CJ문화재단공동기획]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선

48) <반칙왕>

감독 김지운(2000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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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별 볼 일 없는 소시민 청년이 밤에는 하늘을 날아 인류를 구한다.’ 할리우드 히어로물의 공식은 평범한 샐러리맨들의 오랜 판타지다. <반칙왕>의 소심한 은행원 대호(송강호)도 낮과 밤이 다른 이중의 삶을 산다. 낮의 대호는 이런 모습이다. 출근길부터 ‘지옥철’과 사투하고도 늘 지각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상사는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그에게 시도 때도 없이 헤드록을 걸어 괴롭힌다. 짝사랑하는 여인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 ‘동물의 왕국’과 같은 현실에서 그는 늘 주눅 든 존재다. 그러나 밤의 대호는 활동한다. 그는 사각의 링에서 가면을 쓰고 잔기술을 부리는 ‘반칙왕’ 프로레슬러가 된다. 일상의 피로에 찌든 몸, 상사의 헤드록 한번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몸이 아니라, 능동적인 몸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대호가 사는 곳은 할리우드 장르가 아니라 한국 사회다. 할리우드 히어로의 신세 역전 서사는 대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밤마다 그의 영혼을 구원해주는 프로레슬링은 이미 오래전 인기가 쇠락한 엔터테인먼트다. 게다가 그가 연마하는 기술은 반칙이다. 대호가 상사의 헤드록을 벗어나는 법에 대해 묻자, 관장은 그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대호가 밤에 몰두하는 행위는 낮의 비굴한 일상이나 비열한 상사에게 저항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밤의 대호가 타이거 마스크를 쓴다고 해서 낮의 대호가 이름 그대로 ‘거대한 호랑이’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일상의 전복이나 균열은 <반칙왕>의 목적이 아니다. 여기에는 그보다 활기찬 일탈적인 힘이 있는데, 그것은 유희다. 그가 링에서 배우는 건 시합에서 이기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재미있게 노는 법이다. 폭탄주를 돌리고 유흥가를 방황하는 대신 ‘제대로’ 놀아보기 위해 관성적인 몸을 깨우고 탐구하고 단련하는 아저씨. 그는 한국영화사상 가장 무력하고 찌질한 아저씨가 아니라, 가장 유쾌하고 건강한 아저씨였던 것이다.

남다은/영화평론가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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