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은 유독 터잡기에 시간이 걸렸다. 태조 5년(1396년) 사직동 고개에 들어섰다가 태종 13년(1413년) 풍수상 시비로 경희궁 서쪽 언덕으로 옮겨 서전문으로 불렸다. 세종 4년(1422년)엔 그 자리가 통행하기 험해 현재의 남쪽 마루터로 옮겼다. 돈의문이 ‘새문’ ‘신문’으로 불리고, 그 안쪽에 신문로·새문안길이 생긴 것도 세 왕을 지나 늦게 자리잡은 까닭이었다.
돈의문은 중국 사신과 개성·마포나루터 상인들이 드나든 ‘교역의 문’이었다. 성문 밖에는 중국 사신을 맞은 모화문과 경기감영이 위치했다. 일제가 1915년 도로를 넓히며 허물 때도 돈의문은 서울의 첫 노면전차(서대문~청량리) 출발지였다. 당시 헐린 목재는 경매 끝 205원50전에 낙찰됐다고 한다. 풍파도 많았다. 임진왜란 중 문루가 불탔고, 인조반정 후 이괄이 도성을 침공했던 문이고,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려고 파루종이 울리자 들이닥친 문이었다. ‘의(義)’자를 이름에 새기고도 왜적·반란·낭인들을 지켜봤고, 일제가 없애버린 그 문은 1세기 뒤 4차산업혁명 속에 온전히 ‘재건’됐다.
복원은 험로였다. 10년 전 서대문고가차도 철거 후 원형 복원 계획을 내놨던 서울시의 선택은 디지털이었다. 교통·보상 문제로 실제로 짓지 못하고 민관이 함께 우회로를 잡은 것이다. 아쉬움과 달리, 전문가들의 지혜와 땀이 밴 AR앱과 돈의문박물관에서 VR기계로 직접 본 가상세계는 ‘문화재 지평’을 새로 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루 4차례 조도를 달리한 성벽·홍예문·단청 고증이 깔끔하고, 숙종 때 현판을 쓴 유학자의 한문 필체를 분석해 만든 한글 현판이 신선하며, 문루에선 한양의 야경이 보인다. 5G 시대 디지털 문화재는 막힘없고, 창의적이다. 전국으로 뻗어나갈 그 출발점에 돈의문이 세워졌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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