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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장자, 문왕에게 삼검을 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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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지검(天子之劍) 있으면 나라는 누구도 흔들 수 없다

제후지검(諸侯之劍) 있으면 나라는 결단코 지지 않는다

서인지검(庶人之劍)뿐이면 나라는 처참한 쑥대밭 되니

문왕 시절 서인지검 난무해 한 번도 경험 못한 나라 됐네

조선일보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 세상이 하수상하여 〈장자(莊子)〉를 들췄더니 ‘설검(說劍)’ 편의 세 가지 검(三劍) 이야기가 느닷없이 눈에 들어왔다. 헛바람 들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어 기막힌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옛날 문왕(文王)은 칼싸움을 좋아하여 식객으로 모여든 검사(劍士)만 족히 삼천 명이 넘었다. 밤낮으로 문왕 앞에서 칼싸움하여 죽고 다친 자가 한 해에 백여 명이나 되었어도 그칠 생각은커녕 되레 즐기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수년이 지나자 나라 형편이 말이 아니게 되었고 급기야 이웃 나라 제후가 옆구리를 치며 공략해 들어왔다.”

# 태자(太子)가 이를 걱정하여 좌우 측근들을 모아놓고 말하길 "누가 왕에게 간하여 칼싸움을 그치게 할 것인가." 좌우의 신하들이 말했다. "장자(莊子)라면 능히 할 수 있을 것이외다." 이에 장자와 태자가 어렵사리 만났을 때 태자 말하길 "우리 문왕께서는 쑥대처럼 풀어헤친 더벅머리에 눈을 부릅뜨고 거친 소리를 질러대는 그런 자를 좋아하십니다." 그러자 장자는 평범한 옷을 벗고 대신 검복(劍服)을 갖춰 입은 후 문왕을 만났다. 그때 예를 갖춰 잰걸음으로 걷지 아니하고 왕을 보고서 절도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왕께서 칼싸움을 좋아하신다 하기에 제 검을 가지고 왕을 알현코자 한 것입니다." 이미 칼을 빼 든 문왕이 곧장 대꾸하듯 물었다. "그대의 검은 어느 정도의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가?" 장자가 받아 말하길 "신(臣)의 검은 열 발짝 나아갈 적마다 한 사람을 쓰러뜨리고, 그렇게 하여 천 리를 나아가는 동안 가로막을 자가 없습니다." 이에 문왕이 "천하무적이로다!" 하며 감탄한 후 이런 고수(高手) 검객에게 맞서 싸울 검사들을 뽑기 위해 휘하 식객 검사들이 7일 동안 겨루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죽거나 다친 이가 60여 명이었다. 그 가운데 대여섯 명을 추려내 고수 검객 장자와 맞서게 했다. 대결에 앞서 문왕이 먼저 이르길 "싸울 검 길이는 어느 정도가 좋겠는가?" 하니 장자가 대꾸하길 "신에게는 세 가지 검이 있는데 오직 왕께서 쓰자고 하시는 것을 따를 것이니 먼저 이에 대해 설명드리고 나서 일합(一合)을 겨루겠나이다." 왕이 궁금하여 말하길 "세 가지 검이 무엇이냐?" 하니 장자가 "천자지검(天子之劍), 제후지검(諸侯之劍), 서인지검(庶人之劍)이 그것입니다" 하고 아뢰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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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가 말했다. "천자지검은 연나라의 연계(燕谿)와 색외(塞外)의 석성(石城)을 칼날 끝으로 삼고, 제(齊)나라의 대산(岱山)을 칼날로 삼으며,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를 칼자루로 삼아 사방 오랑캐를 치고, 춘하추동 사시의 추이에 따라 주위를 둘러치며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통제하고 형벌과 은덕으로 휘두르니 봄여름에는 화기(和氣)로 유지하고 가을 겨울에는 위엄(威嚴)으로 내려칩니다. 이 검을 한번 쓰면 온 천하가 떨며 복종합니다." 한마디로 천자지검은 천하를 떨게 하고 엎드리게 만드는 칼이니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려면 반드시 거머쥐어야 할 검이다. 하나 기껏 북쪽 경계 너머에서 '삶은 소 대가리도 웃을 일'이라는 조롱을 받고서도 응징은커녕 말소리조차 크게 못 내는 문왕이 감히 이런 천하지검의 위엄과 위력을 감당이나 하겠는가 하는 것이 세간의 민심이었다.

# 장자가 다시 말했다. "제후지검은 지혜와 용기 있는 이를 칼끝으로 삼고, 욕심 없는 청렴한 이를 칼날로 삼으며, 현명하고 어진 이를 칼등으로 삼고, 충의와 성덕이 있는 사람을 칼자루의 테로 삼으며 무용이 뛰어난 호걸을 칼자루로 삼습니다. 이 검을 곧장 세우면 앞에서 당할 것이 없고 휘두르면 사방에서 당할 것이 없습니다." 장자의 말대로 제후지검은 사람을 제대로 써 기강을 잡고 민심을 수습해 나라의 사방을 안정시키는 검이다. 하지만 '곡학아세'하는 이가 칼끝이 되고 '내로남불'하는 이가 칼날이 되며 '표리부동'한 이가 칼자루가 되는 한 그런 검은 내려치는 순간 부러지다 못해 자기를 되찌르고 말 일이다.

# 또 장자가 말한다. "서인지검은 쑥대처럼 풀어헤친 머리에 철모를 깊게 눌러쓰고 두 눈 부릅뜬 채 괴성을 지르며 위로는 상대 목을 베고 아래로는 상대의 간과 폐를 찌를 뿐인 천하 잡류의 칼입니다. 서인지검을 쓰는 것은 투계(鬪鷄), 즉 싸움닭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 문왕께서는 천자와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서인지검을 좋아하시니 황송하오나 저는 왕을 경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지검으로 천하를 안녕되게 하고, 제후지검으로 나라의 질서를 잡아 부국강병의 꿈을 이뤄내기는커녕, 온갖 미몽과 환상에 사로잡혀 밖으로는 옴짝달싹 못 하면서 안에서만 못난 것들을 닭싸움질시키듯 닦달하기에 여념 없는 문왕의 경박한 처신을 장자는 힐난한 것이다.

# 장자의 세 가지 검에 대한 설파가 있은 뒤 “문왕은 창피함을 느꼈던지 궁중에 칩거한 채, 석 달 넘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삼천 검사는 평소 칼싸움하던 자리에서 서로 상대를 칼로 찌르며 모두 죽었다.” 이 와중에 자유 찾아 목숨 걸고 북쪽 국경 넘어와 어렵게 살던 어미와 자식이 굶어 죽었다. 오호애재(嗚呼哀哉)라! 투계 같은 칼싸움꾼들을 거둬 먹이며 닭싸움시키는 데 마구 쓸 돈은 있었으나 정작 살아보겠다고 목숨 걸고 국경 넘은 백성은 굶어 죽는 나라가 되었으니 ‘더는 남에게 지지 않는 나라’는 무엇이며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는 이 무슨 공허한 말잔치인가. 참으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던 문왕의 즉위사(卽位辭)는 이렇게 실현되고야 마는 것인가?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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