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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김혜진, 노동 더불어 숲] 방송계 노동자들의 권리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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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2017년 12월20일, 오픈채팅방 ‘방송계 갑질 119’가 문을 열었다. 방송계 갑질 119는 방송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온라인 공간으로서, 8명의 법률가와 활동가들이 상담을 담당해왔다. 나는 이곳의 운영자로 함께했다. 방송계 갑질 119는 2019년 8월15일 문을 닫았다. 이 글은 방송계 갑질 119가 운영되었던 지난 600일간의 기록이다.

방송계 갑질 119에는 많은 이야기가 쏟아졌다. 임금을 상품권으로 받았다는 제보 이후, 심지어 배추, 염색약으로 임금을 받았다는 제보도 있었다. 임금은 반드시 통화(通貨)로 지급해야 한다는 노동법의 원칙은 방송계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해고도 단골 상담 메뉴였다. 노동법은 해고의 절차를 엄격하게 정하고 있지만 방송계 노동자들에게 ‘해고의 절차’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드라마 스태프들의 장시간 노동 기록도 계속 경신되었다. 방송계 노동자 10명 중 9명이 성희롱을 경험했다는 실태조사 결과도 나왔다.

열정을 갈아넣는 곳이 방송계라지만, 이런 노동조건이 계속 유지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이었다. 그것은 바로 ‘체념’이었다. 이 온라인 공간은 체념과 냉소의 정서가 지배적이었다. 불만은 높았지만 결론은 ‘어쩌겠어’인 경우가 많았다. ‘방송계는 원래 그래’라는 인식이 뿌리박고 있었고, 인맥을 통해 일을 구하는 좁은 동네이기에 밉보이면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두려움도 냉소를 부추겼다. 찍히면 바로 퇴출되는 방송계 구조에서 노동자들은 체념을 체화한 것이다.

정부 기관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퇴직금을 못 받거나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은 고용노동부에서 ‘당신은 프리랜서이니 해당 사항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계약의 형식보다 실제 어떻게 일을 하는가가 노동자성 판단에 중요하다고는 해도, 노동자들은 방송계를 떠날 마음을 먹지 않는 이상 소송을 하기 어려웠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방송계 비정규직의 현실을 개선해보고자 표준계약서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사가 그 계약서를 마음대로 변형하고 그에 근거하여 작가들을 해고해도 대응 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핵심은 방송사다. 외주제작비용을 결정하고 노동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방송사다. 언제라도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도 방송사다. 하지만 방송사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삶을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 열정을 가지고 일해왔던 방송계 비정규직들이 전망을 잃고 이곳을 떠나야 하나 고민하는데, 더 이상 젊은 노동자들이 충원되지 않고 있는데도 방송사들은 비정규직들을 방송을 만드는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외주제작 시스템에 안주하고 있었다.

이 견고한 방송계의 구조에 지쳐갈 때쯤, 오픈채팅방에서 누군가가 ‘노조가 필요해’라고 말했다. 그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방송계 갑질 119의 상담 스태프들이 오프라인 모임을 제안했고, 2018년 2월 오프라인 모임이 진행되었다. 곳곳에서 노조 만들기를 갈망하거나 준비해왔던 이들이 모였다. 용기를 낸 방송계 노동자들은 그날 노동조합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2018년 7월4일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출범했다. 그리고 1년 뒤 지상파 방송사들과 제작사협회, 언론노조,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모여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을 위한 공동논의 끝에 방송스태프들에게 표준근로계약서를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변화는 이제 시작되었다.

방송 제작 현장의 노동조건이 바뀌었느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두려움 때문에 나서지 못했던 이들이 이제는 노동시간을 지키라고 요구하고, 개별계약을 요구하고, 퇴직금을 요구한다. 방송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 지독한 체념의 벽을 뛰어넘는 이들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방송계의 노동 현실이 바뀌리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래서 방송계 갑질 119는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닫는다. 더 많은 방송계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하여 권리찾기에 함께 나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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