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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정길연의사람In] 의자와 거울이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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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선생의 전화는 좀 뜻밖이었다. 하필 통화하기가 애매할 때였다. 나중에 내 쪽에서 다시 전화를 걸겠다는 양해가 잘 전달되지 않았는지 선생은 심경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떤 일로 크게 마음을 다친 듯했다. 지난해 가을쯤 도보여행 길의 인연으로 한 차례 보았을 뿐인 나를 통화상대로 지목했다는 건, 그만큼 마음에 뭉친 응어리가 굳고 독하다는 뜻일 듯해서 차마 말을 끊지 못했다. 나무기둥이라도 붙들고 넋두리를 하고 싶을 때가 누구에겐들 없으랴.

전화를 끊고 나자 어떤 풍경 하나가 떠올랐다. P선생을 만난 그 길의 풍경이 아닌, 예전에 살았던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던 풍경이었다. 흑백의 돌로 채워가는 바둑판처럼 하루가 다르게 고층아파트가 들어차는 시의 외곽에 작은 과수원이 고집스레 버티고 있었고, 과수원 옆구리에는 곁방살이하듯 푸성귀를 심어놓은 텃밭이 있었다.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과수원 울타리 앞 인도에 내놓은 예닐곱 개의 의자였다. 어느 집에선가 내다버린 것 가운데 쓸 만한 것을 옮겨다 놓았는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의자들은 하나같이 짝이 맞지 않고, 조금씩 망가진 모양새였다. 과수원 울타리에는 의자만큼이나 모양새가 제각각인, 역시 조금씩 망가진 예닐곱 개의 거울액자가 야외미술관의 설치 전시물처럼 띄엄띄엄 걸려 있었다.

누가 그 의자를 거기에 놓아두었을까. 누가 그 거울을 거기, 딱 사람 눈높이만 한 위치에 걸어두었을까. 햇살 속에서도, 장맛비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의자, 거울이라니. 그 딱딱한 사물의 경이로운 침묵이라니.

그 도로 앞을 지나다니는 동안 나는 한 번도 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누군가 거울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나 또한 의자에 앉아보거나,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 앞을 지나다니기만 했다. 일부러 길을 돌아 그 앞을 지나기도 했다. 이해 따위에 매이지 않는 기다림과 계산하지 않은 배려와 옹졸하지 않은 여유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졌다. 그럴 때면 어렸을 적에 듣던 노랫말을 웅얼거렸다.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돼 드리리다 ….”

그날 P선생에게는 잠시 머물러 쉬어갈 의자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내게, 우리 모두에게 의자와 거울이 놓인 그 풍경처럼 고즈넉한 온기가 필요한 것처럼.

정길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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