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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그 시절 용암같이 뜨거웠던 `마그마`의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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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오브락 - 120]대표적인 대학가요제 출신 스타로는 신해철이 있다. 밴드 무한궤도를 이끌고 혜성같이 등장한 그는 대상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가요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록 키즈'였던 그는 솔로 시절 '꽃미남' 발라드 가수로 활동하다가 훗날 그룹 '넥스트'를 결성하고 끓어오르던 록 본능을 여과 없이 발휘한다. (신해철은 이런 걸로 주목받는 걸 매우 싫어했지만) 무한궤도는 서강대 연세대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이 총집결해 만든 밴드로 화제를 모았다. 그들이 1988년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그대에게'로 대상을 따내기 훨씬 전 비슷한 콘셉트로 주목받았던 밴드가 있었다. 명곡 '해야'를 남긴 밴드 마그마가 주인공이다.

마그마는 조하문 김광현 문영식 3명으로 이뤄진 라인업으로 1980년 대학가요제에 나가 은상을 차지했다. 서울대와 연세대 출신으로 이뤄진 밴드였다. 마그마의 '해야'는 동시대에 나온 서양 하드록 넘버와 견줄 만한 수작이었다. 아마추어 이상의 실력을 자랑했다. 능숙한 솔로 플레이로 곡을 화려하게 만드는 김광현의 기타, 칼박을 자랑하는 문영식의 드럼은 이들이 대학생인지 전문 세션맨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프런트맨 조하문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베이스를 치며 상당한 수준의 보컬 능력을 과시했다. 조하문은 그 시대에 흔치 않게 두성 발성으로 고음을 올리는 보컬 중 하나였다. 당시는 지금처럼 보컬트레이닝이 활성화된 시기도 아니었다. 유튜브만 들어가면 볼 수 있는 보컬 강좌도 그때는 전무했다. 오로지 서양의 발성을 수없이 카피하면서 얻은 능력이라 할 것이다. 이들은 단 한 장의 앨범만 내고 해체했지만 이들이 미친 영향력은 크다. 포크가 주류였던 당시 밴드 문화에 하드록, 헤비메탈을 들고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이런 측면에서 무한궤도의 성공 역시 마그마의 발자취에 일부 기댄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해야는 발표된 지 거의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무대에 종종 올려지며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매일경제

(좌측부터)문영식, 조하문, 김광현/사진=나무위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고운 해야

아침을 기다리는 애띤 얼굴

어둠이 걷히고 햇볕이 번지면

깃을 치리라

말간 해야 네가 웃음지면

홀로라도 나는 좋아라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고운 해야

아침을 기다리는 애띤 얼굴

해야 떠라 해야 떠라

말갛게 해야 솟아라

고운 해야 모든 어둠 먹고

애띤 얼굴 솟아라

눈물 같은 골짜기에

서러운 달밤은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라

후략

대학가요제에서 마그마가 연주한 이 곡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첫 번째는 중간에 기타 솔로를 주무기로 삽입된 연주 구간이었다. 프로 밴드 못지않게 곡을 끈적끈적하게 끌고가면서 특유의 속도감을 잃지 않았다. 아마추어 대학생이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쉽지 않은 도전과 곡 배치였다. 두 번째는 곡 후반부 '아마도 없는 뜰에' 구간부터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조하문의 두성이다. 잘생긴 얼굴로 별 표정 변화 없이 빠르게 손가락을 놀리면서도 얼굴 내부 공명을 활용해 두성 음질의 곡을 뽑아내는 조하문의 단단한 샤우팅을 놓고 호평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학가요제 이후 단숨에 스타로 발돋움한 이들은 군 문제 등에 걸려 갈등하다가 결국 앨범 하나만 내고 해체하기로 한다. 해체 이후 리드 기타 김광현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그는 불문과였다) 박사학위를 받고 대구대에서 교수로 활동 중이다. 드러머 문영식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한국 경제연구소 등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해체 이후에도 대중의 시선에 머물러 있던건 조하문이었다. 대중은 그의 탁월한 보컬 역량을 곁에 두고 싶어했다. 그는 대중에게 인기를 끌 만한 훤칠한 키와 야성적인 마스크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발라드를 부르는 솔로로 변신해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이 밤을 다시 한번' 등의 히트곡을 뽑아내는 인기 가수로 발돋움한다(조하문의 곡을 카피해 무대에 올린 가수 면면만 봐도 당시 그의 인기를 알 수 있다. 서문탁 홍경민 몽니 정동하 이석훈 등의 쟁쟁한 가수가 여전히 그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당시 그는 방송사 섭외 1순위에 꼽힐 만큼 대중성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조하문은 인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그저 음악이 좋았던 청년"이라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말도 시키는 말 외에는 별로 하지 않았던게 사실이다. 음악이 좋았을 뿐 엔터테이너로서의 기질은 없었던 것이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교만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천성적으로 자신에 대한 포장에 능숙해야 하는 연예인의 삶과는 맞지 않았던 셈이다. 그래서 그는 젊은 시절 대마초도 접하고, 공황장애에 시달려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망가져 간다.

지금 조하문은 목사로의 삶을 살고 있다. 뒤늦게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캐나다로 건너가 목회활동을 하다가 현재는 한국의 한 교회 담임목사로 활동 중이다. 교회 외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주로 기독교 방송뿐이다. 그는 화려했던 20~30대 삶을 '힘들었다'고 표현하고 목사로의 현재의 삶에 대한 '감사'를 얘기한다. 사실 그의 커리어 후반부에 나왔던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에서 나오는 '당신'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어둠을 헤치는 세월은 말없이 흘러만 가는데

지나간 시간이 서러워 한없는 눈물만 흐르네

그러던 어느 날 사랑을 만났네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내 모든 사랑드려요

이 눈물 보시는 당신에게 내 마음드려요

어느덧 구름은 걷히고 따스한 햇살이 내게로

젖었던 내 마음 마르고 파아란 하늘이 감싸오네

이제는 나는 사랑을 배웠네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내 모든 사랑드려요

이 눈물 보시는 당신에게 내 마음드려요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내 모든 사랑드려요

이 눈물 보시는 당신에게 내 마음드려요

여기서 나오는 '당신'은 곡 발표 직후에는 '연인' 정도로 해석됐지만 지금은 그가 신앙을 염두에 두고 '당신'을 '절대자'로 가정해 쓴 곡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한마디로 대중가요를 가장한 'CCM'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에게 목사라는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가 한국 록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밴드를 이끌었고, 또한 한때 정말 좋은 가수였다는 사실이 부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홍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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