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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 경비실’… “月 1000원이면 해결됩니다” [이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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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미설치 아파트 가보니… / 1평 남짓 공간 선풍기선 더운 바람만 / 책상엔 ‘더위 잘 견디는 습관’ 스크랩 / 고령에 용역신분… “잘릴까 말도 못해” / 주민들 “설치·관리비 부담” 반대 여전 / 서울 아파트 4%가 에어컨 설치율 0% / 전문가 “생활형 갑질로 봐야” 지적도

서울 낮 최고기온이 33도까지 올랐던 지난 20일 오전 11시쯤. 서울 도봉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 임모(68)씨는 땡볕에 서서 분리수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업복이 순식간에 땀으로 젖었지만 그가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 쉴 곳은 없었다. 1평 남짓의 아파트 경비실에는 에어컨이 설치돼 있지 않아 찜통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기자가 설치된 선풍기를 틀어봤지만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더운 바람이 나왔다. 그동안 여름마다 경비원들의 이런 고충이 반복됐는지 책상 한편에는 ‘더위 잘 견디는 몸 되는 생활습관’이라는 신문 기사가 스크랩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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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는 더위를 피해 경비실 앞 복도에 의자를 두고 앉았지만 땀은 멈추지 않았다. 이 아파트 경비실에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는 이유는 입주민들의 반대 탓이다. 임씨는 “예전엔 경비실에 에어컨이 있었지만 일부 경비원이 업무를 볼 때 끄고 나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뗐다는 얘기를 선임자에게서 들었다”고 한숨 쉬었다. 서울시가 지난달 경비실 에어컨 설치를 독려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이 아파트 단지에 게시하려 했으나 입주자들 반대로 게시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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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 단지 내 경비실 모습. 1평 남짓한 공간에 에어컨도 없어 경비원들은 거의 밖에서 지낸다.


같은 날 인근 노원구의 한 아파트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경비원들은 에어컨이 설치돼 있지 않은 아파트 경비실에 들어가지 않았고 대부분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

경비원 엄모(63)씨는 “작업하면 땀범벅이 되는데 근무복도 갈아입을 수 없다”며 “물이 나오는 아파트 지하실에서 씻으며 버틴다”고 토로했다. 사람이 없는 경비실은 주민들의 택배를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는 2년 8개월 동안 이 아파트에서 경비 일을 했지만 에어컨 설치를 주민들에게 적극 부탁할 수 없다고 했다. 경비원들이 ‘취업 약자’인 이유가 크다.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기 힘든 고령인 데다 용역업체 소속 직원이기 때문이다. 엄씨는 “최근 동 대표 회의에서 에어컨 설치 얘기가 나왔다는데 남의 일이니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며 “우리는 혹시 잘릴까봐 뭐 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다”고 푸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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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피할 곳 없는 서울시 아파트 경비원 1832명… 주민들은 “비용 부담돼”

서울시가 시내 1752개 아파트 단지를 전수 조사한 결과 지난달 기준 77개 아파트 단지(4.4%)의 경비실에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았다. 이들 단지의 경비원 수만 1832명에 달한다. 이들은 올여름도 찜통 경비실에서 보내야 했다. 시내 44개 단지(2.5%)의 경우에는 소수 경비실(전체의 50% 미만)에만 에어컨이 설치돼 ‘운 좋은’ 일부 경비원만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아파트 경비실 내 에어컨 필요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서울시가 포스터 캠페인, 방문활동 등에 나서 지난 4월 이후 139개 아파트 단지 경비실에 에어컨이 들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아파트 단지에서는 주민 반대가 강경해 에어컨이 설치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해당 주민 상당수는 에어컨 설치비와 전기요금에 따른 관리비 부담을 느껴 그런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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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경비실 에어컨 설치율이 제로인 아파트 단지를 대상으로 에어컨 미설치 이유를 조사했더니 ‘예산 부족 때문’이라는 응답(32.5%·중복가능)이 가장 많았다. ‘입주자대표회의 및 입주민 반대 때문’이라는 응답(31.2%)과 ‘설치계획을 논의하지 않았다’(16.9%)가 뒤를 이었다. 경비실 내 에어컨 설치율이 0%인 아파트 단지의 자치구를 살펴보면 도봉구(11곳)가 가장 많았고 노원구(8곳), 송파구(8곳), 서대문구(6곳) 순이었다.

서울시 공동주택과 관계자는 “낙후된 지역의 아파트일수록 경비실 내 에어컨 설치에 부정적인 곳이 많았다”며 “특히 재개발을 생각하는 아파트 주민들은 ‘굳이 돈 들일 필요 있냐’며 설치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에어컨 설치를 강력히 반대하는 일부 아파트 주민의 경우 시가 붙인 에어컨 설치 독려 포스터를 훼손하거나 아예 떼버리는 곳들도 있었다”며 “아파트 단지는 사유재산이라 시는 주민들에게 부탁드리고 설득하는 거밖에 도리가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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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봉구 한 아파트 단지 경비실 책상에 ‘더위 잘 견디는 법’을 소개한 신문 기사 스크랩이 붙어있다.


◆가구당 경비실 에어컨 설치비 1만8000원, 전기세 월 1000원… ‘생활형 갑질’ 말아야

주민들이 우려하는 에어컨 설치, 관리 비용은 얼마나 될까. 지난 6월 53개 아파트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한 송파구 한 아파트 단지의 경우 에어컨 설치비는 대당 43만원이 들었다. 가구별로 따지면 1만8000원 정도의 비용이 발생했다. 전기요금은 더위가 지속한 3개월 동안 각 가구에 4000원가량의 추가요금이 발생했고, 연간으로 따지면 ‘월 1000원가량’이 각 가구에 추가로 드는 것으로 추정됐다.

해당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구청의 권유와 일부 입주민의 요청에 따라 경비실 에어컨 설치는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됐다”며 “지하에 내려가 더위를 피하는 경비원들의 상황과 예상되는 추가요금 부담을 공개해 주민들이 모두 이해해준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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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봉구 한 아파트 단지 내 경비실 모습.


서울 7개 자치구(강서·금천·서초·성동·성북·양천·은평)는 ‘공동주택 지원조례’를 근거로 아파트 경비실 에어컨 설치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경비실 에어컨 설치지원을 자치구에 요청한 단지는 많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시 관계자는 “공동주택 지원조례에 따라 마련된 전체 예산 안에서 각 단지가 에어컨 설치, 폐쇄회로(CC)TV 설치 등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을 요청하는데 주민들이 아파트 경비실 설치를 우선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서울시는 경비실 에어컨 전기요금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민간업체와 함께 소형 태양광발전소를 설치 지원하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아파트 경비실에 에어컨 설치를 안 해주는 것은 ‘생활형 갑질’의 일환”이라고 꼬집었다. 구 교수는 “생활형 갑질은 주로 관습적인 행동에서 나오는데 경비원을 무시하거나 권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여전히 생활영역 곳곳에 있다”며 “소수 아파트 단지가 에어컨 설치를 안 해주고 있는데 인권 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글·사진= 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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