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될 때마다 딸에게 그림책을 읽어 준다던 연상호 감독은 “욕심이겠지만 ‘스타워즈’나 ‘건담’ 같이 모든 세대에게 사랑받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
“너는 오전 1시 50분에 죽는다. 너는 2등급 지옥에 간다. 지옥의 강도는 네가 느낀 최고 고통의 10배다.”
불현듯 찾아온 천사의 말에 한 남성은 좌절한다.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저승사자로부터 도망칠 것인가. 연상호 감독(41)의 연작 애니메이션영화 ‘지옥-두 개의 삶’(2003, 2006년)은 언제나 나쁜 선택을 하고 마는 인간에 대한 잔혹한 우화다.
영화 ‘부산행’(2016년)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그가 이번엔 웹툰에 도전한다. 애니메이션에 바탕을 둔 네이버 웹툰 ‘지옥’의 연재를 지난달 25일부터 시작했다. ‘지옥’은 저승사자가 출몰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과정을 다룬 영화의 프리퀄에 해당한다.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작업실에서 만난 연 감독은 “어릴 때 영화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인간에게 죽음의 시간이 예고되고 저승사자에게 잔혹하게 살해되는, 영화의 핵심 설정은 그대로다.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치는 악몽을 자주 꿨던 그는 대학 시절인 1996년 원작의 시나리오를 썼다. 총 35분가량의 짧은 두 단편 영화는 특유의 어둡고 기괴한 서사와 장면들로 가득하다. 다소 거친 편집과 어설픈 움직임에도 ‘지옥…’은 많은 팬들에게 ‘연상호’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었다.
연상호 감독이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최규석 작가가 그림을 그린 네이버 웹툰 ‘지옥’은 사회에 갑자기 등장한 저승사자라는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다. 최규석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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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감독은 웹툰 시나리오를 새로 쓰면서 힘들었던 20대 기억을 떠올렸다고 한다. 1인 작업인데다 제작비도 부족해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두 단편을 만드는 데 3년이 넘게 걸렸다. 실제 배우의 연기에 애니메이션을 합성하는 ‘로토스코핑’ 기법을 쓰면서 직접 연기부터 그림까지 홀로 모든 작업을 담당했다. 녹록치 않은 제작 여건에 옴니버스 형식으로 염두에 뒀던 시리즈 제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번 웹툰의 그림은 최규석 작가(42)가 맡았다. ‘송곳’으로 이름을 알린 최 작가는 ‘돼지의 왕’(2011년), ‘사이비’(2013년), ‘서울역’(2016년) 등 연 감독 작품의 원화 작업 대부분을 그려왔다. 친구 사이인 둘은 2년 전쯤 맥주를 마시다 웹툰을 기획했다고 한다. 연 감독은 “친한 친구끼리 작업하면 마냥 재미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6개월 간 회의를 하는 동안 은근히 의견충돌이 많았다”고 웃었다.
“영화로 치면 제가 시나리오 작가고 규석이가 감독인 셈이죠. 저랑 다르게 규석이는 꼼꼼한 스타일이에요. 저보다도 먼저 시나리오에 나온 인물의 모습을 생각해놨더라고요.”
사실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인물 표정과 어둡고 염세적인 분위기는 연 감독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특징. 둘 다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 등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연 감독은 “규석이 그림은 영화 같다. 제 시나리오의 캐릭터를 잘 잡아준다”고 평가했다. 최 작가는 “상호는 끝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화수분’ 같은 존재”라고 맞받았다.
‘돼지의 왕’(2012년)으로 감독주간, ‘부산행’(2016년)으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되며 두 번이나 칸 국제영화제의 부름을 받은 연 감독.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제가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예상치 못한,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첫 실사영화이자 국내 최초 좀비 블록버스터 ‘부산행’으로 ‘1000만 감독’ 반열에 올랐지만, 연 감독은 흥행이 보장된 속편 대신 ‘염력’(2018년) 연출을 택했다.
연상호 감독은 네이버 웹툰 ‘지옥’을 연재하면서 검은 형체의 저승사자 등 일부 설정들을 연작 애니메이션 영화 ‘지옥-두 개의 삶’에서 가져왔다. 최규석 작가 제공 |
물론 ‘염력’은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우물을 판다. 지난해엔 직접 그린 그래픽노블 ‘얼굴’을 출간했다. 그는 “규석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시나리오가 있으면 웹툰도 직접 그려보고 싶다”며 웃었다.
“‘염력’은 ‘부산행’이나 이전 애니메이션과도 비슷한 지점이 없었죠. 그래서 관객들이 느낀 배신감이 컸던 것 같아요. 그래도 한국에서 주류 장르가 아닌 ‘B급 코미디’를 해봤다는 것에 개인적으론 만족합니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저예산 영화를 만드는데 익숙했던 그도 ‘부산행’ ‘염력’ 등을 연출하며 “협업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연 감독은 “혼자 작업을 많이 해와 그런지 시나리오부터 촬영까지 모든 과정을 통제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남 이야기를 들으면 제 색깔이 없어진다는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야기꾼답게 틈틈이 언제 영화화할지 모르는 시나리오들을 컴퓨터에 저장해 놓곤 한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땐 집에 쌓여있는 만화책들을 다시 들춰본다. 내년 방영 예정인 tvN 드라마 ‘방법’은 시나리오 집필을 이미 마쳤다. ‘방법’은 국내 최대 정보기술(IT) 기업의 비리를 파헤치는 기자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녀가 얽힌 스릴러물. ‘사이비’ 이후 새 장편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도 썼지만 아직은 답보 상태. 그는 “투자금 회수 등 전략을 세우기 어려울 정도로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이 작다”며 아쉬워했다.
그가 연출 중인 영화 ‘반도’에 대해 물으니 “일주일에 절반을 대전 촬영지에서 보내고 있어 정신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내년 여름 개봉을 앞둔 ‘반도’는 배우 강동원, 이정현이 출연하는 좀비물. ‘부산행’의 속편 격으로 4년 뒤 폐허가 돼버린 서울을 배경으로 한다. 총 제작비는 190억 원으로 전편보다 규모가 더욱 커졌다.
“‘반도’를 촬영하면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느낌을 받아요. 컴퓨터그래픽(CG) 작업이 워낙 많아서요. 하하.”
신규진기자 new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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