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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기자칼럼]불평등은 저절로 해소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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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커리 코원은 브루클린 공원에서 막대기로 ‘무장’한 채 우리 아이 이턴 롱스트리트의 얼굴을 쳤다.” “잠시만요, 무장이라고요? 그냥 ‘가지고’ 정도가 좋겠군요.”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동명 원작을 영화로 옮긴 <대학살의 신>은 아이들 싸움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한 아이의 집에 모인 두 부부 이야기다. 처음에야 걱정과 위로, 사과의 말이 오가지만 이들의 논쟁은 결국 싸움으로 번져 서로의 본색을 드러낸다.

경향신문

때린 아이의 아빠 앨런은 자신이 변호하는 제약회사가 발매한 혈압약의 부작용을 덮으려 한다. 교양이 넘치는 그의 부인 낸시는 대화 도중 연신 전화를 받는 남편에게 눈치를 주지만, 막상 자신의 명품가방이 내동댕이쳐졌을 때는 예의는 온데간데없다. 맞은 아이의 엄마 페넬로피는 ‘다르푸르 학살 사태’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다. 그러나 실상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고통보다는 낸시의 구토로 더럽혀진 절판된 화집이 더 걱정이다. 그의 남편 마이클은 수익만 좇는 제약회사를 비난하지만, 정작 가족 몰래 햄스터를 내다버린 사실이 들통나 낸시에게 도덕성을 공격받는다.

그렇다. 네 사람은 모두 배울 만큼 배운, 먹고살 만한 미국의 중상류층이다. 영화는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의 위선을 비웃는다. 여기에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아동 성폭행 혐의로 유럽에서 도피 생활을 하고 있는 로만 폴란스키라는 것을 더하면 씁쓸함은 배가된다.

새삼스럽지 않은 이 영화 얘기를 꺼낸 것은 여태껏 벌어지고 있는 조국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여러 논쟁들이 더 이상 진보·보수나 여야 등 이념이나 진영을 매개로 한 갈등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가진 자들이 부를 대물림하고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위선과 표변을 일삼는 ‘한국 사회 기득권자들에 대한 보고서’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모순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녀들이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월가 점령시위 등에서 불평등한 사회를 비판하며 울려퍼진 ‘우리는 99퍼센트다’ 구호에는 대다수의 분노가 집약됐다. 당시 최상위층인 1퍼센트에 대한 비판을 이끌었던 이들은 중상류층 지식인들이었다. 하지만 이젠 불평등 구조를 분석하려면 ‘중산층’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책임도 빼놓아서는 안된다. 경제학자 리처드 리브스의 책 <20 VS 80의 사회>의 관점을 빌려보자. 리브스는 기존 불평등 담론에서 벗어나 논의의 초점을 20 대 80의 사회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상류층은 인맥과 연줄을 통해 교육, 인턴, 고소득 일자리 등을 자신의 자녀에게 마련해주고 사회적 지위를 물려주려 한다”며 이를 ‘기회 사재기’라고 부른다. 이는 자녀 세대가 하위 계층으로 떨어지는 위험을 막아주는 ‘유리 바닥’이 된다고 했다. 반면 계층 하부에선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내가 리브스의 주장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지적한 상위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중상류층의 행태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된 현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 이미 커져버린 불평등의 간극을 좁히려면 나머지 80퍼센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강남 집값 잡기’보다는 차라리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서울시도 강남·북 균형발전을 핵심 정책으로 내세운다. 지난달 강남에 있는 인재개발원과 서울연구원,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강북 이전을 확정했지만 내부 구성원들의 반발이 심하다.

이치는 간단하다. 불평등의 간극은 거저 줄지 않는다. 가진 자들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리브스의 친구처럼 “나는 평일에는 불평등 문제를 비난하고, 주말과 저녁에는 불평등 강화에 일조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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