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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정책돋보기]부자가 벌금 더 낸다? 월급쟁이가 더 불리할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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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와 조국 법무부 장관이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사법개혁 및 법무개혁 당정협의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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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이 재산이 많거나 소득이 높은 범죄자에게 더 많은 벌금을 부과하는 제도 도입을 추진한다.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18일 국회에서 당·정 협의회를 마친 뒤 “경제적 사정에 따라 벌금액을 산정하는 재산비례 벌금제를 도입해 경제적 능력에 따라 처벌 정도와 효과가 달라지는 불평등한 벌금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당정 협의 자료에 따르면, 법무부는 재산 조사 방식, 1일 벌금액 한도 등은 해외 사례와 각계 의견 수렴 등을 통해 정할 계획이다.

재산비례 벌금제의 정확한 학계 용어는 일수 벌금제다. 현재 한국은 총액 벌금제를 택하고 있는데, 어떤 범죄에 대해 벌금의 총액이 정해져 있고 이 액수를 모든 피고인에게 동일하게 부과하는 방식이다. 반면 일수 벌금제는 범죄의 책임을 액수가 아닌 일(日)수로 정하고, 1일에 해당하는 벌금액은 소득 또는 재산에 따라 결정한다. 예컨대 어떤 이가 범죄를 저질러 ‘3일’ 벌금형을 받고, 판사가 소득 등을 고려해 피고인의 1일 벌금을 50만원으로 판단한다면 그가 내야 하는 벌금은 150만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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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벌금 부과 사례 [KBS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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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 벌금제는 1921년 핀란드가 최초로 도입한 이후 스웨덴·덴마크·독일·스위스 등 투명성이 높은 유럽 국가 중심으로 시행하고 있다. 핀란드 휴대전화 제조업체 노키아의 안시 반요키 전 부회장이 과속해 벌금으로만 11만 6000유로(약 1억 5300만원)를 낸 사례는 유명하다.

한국도 1986년부터 법무부 차원에서 논의했다. 19대 국회에서 6건의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가 임기만료로 폐기됐고, 20대 국회에선 2건이 발의된 상태다. 하지만 현실성 부족, 위헌 가능성 등의 논란이 항상 뒤따라붙는다.

우선 재산 또는 소득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많다. 19대 국회 때인 2015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제1소위원회 회의에서 김주현 당시 법무부 차관은 “피고인의 소득이 제대로 파악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서로 간에 형평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근로소득자의 소득은 파악이 가능하지만 자영업자의 소득 자료는 부정확한 게 현실인데, 소득을 토대로 벌금을 부과할 경우 근로소득자가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지적이다. 이른바 ‘월급쟁이 유리지갑’ 현상이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고위공직자의 재산 신고도 못 믿는다는 지적이 많은데 범죄자들의 재산을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라고 말했다. 약식 사건(벌금형으로 결론 나는 간단한 사건)만 연간 약 70만 건인데 일일이 소득·재산을 확인한다는 건 행정 낭비라는 지적도 있다. 영국도 일수 벌금제를 1992년 도입했지만, 소득과 재산 조사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6개월 만에 시행을 중단했다. 미국도 뉴욕주 등 일부 주에서 시범 실시했지만 비슷한 이유로 미국 전역에 도입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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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이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사법개혁 및 법무개혁 당정협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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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법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비판도 있다. 19대 국회에서 남궁석 전 법사위 수석전문위원은 “동일한 범죄에 대해서 벌금이 피고인의 경제적 상황을 이유로 달라지기 때문에 (형법 대원칙인) 책임주의 원칙에 위배가 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책임주의는 범죄 책임의 정도에 따라 벌금 등이 결정돼야 한다는 원칙이다. 장 교수는 “헌법의 평등주의 원칙에도 배치된다”며 위헌 가능성도 지적했다.

반면 법사위 민주당 간사인 송기헌 의원은 “국민연금이나 세금 부과를 위해 사용하는 재산·소득 자료를 활용하면 도입 불가능한 제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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