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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삭발의 정치학…구시대 유물이냐 지지층 결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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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5선 중진인 자유한국당 이주영 국회 부의장(가운데)과 심재철 의원(오른쪽)이 18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사퇴를 촉구하며 삭발을 했다. 왼쪽은 앞서 삭발한 황교안 한국당 대표.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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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의혹이 불거진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검찰 수사와 야권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자 정치권에서 한동안 사라졌던 '삭발 투쟁'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18일에도 5선 국회의원이자 국회 부의장인 이주영 의원과 역시 5선인 심재철 의원 등 자유한국당 중진 의원이 '릴레이 삭발 투쟁'에 가세했다. 현역 국회 부의장이 삭발 투쟁에 나선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 앞서 황교안 한국당 대표도 조국 장관 사퇴와 문재인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머리를 밀었다. 제1야당 대표의 삭발 투쟁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 같은 잇단 삭발 투쟁에 대해 야권에서는 투쟁의 '결기'를 보여줬다는 평가도 있지만 구시대적 정치 문화의 표본이라는 냉소적인 평가도 나온다.

'조국 정국'에서 삭발 투쟁은 여성 의원들이 앞장섰다. 이언주 무소속 의원이 지난 10일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죽었다"며 삭발을 했고, 다음날에는 박인숙 한국당 의원이 "(조 장관 임명은) 국민에 대한 선전포고"라며 머리를 잘랐다. 여성 의원이 삭발한 것은 2013년 이후 사상 두 번째다. 대여 강경 투쟁 분위기와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정치인들의 셀프 마케팅 분위기가 맞물리면서 앞으로 야권을 중심으로 '빡빡머리' 의원이 더 늘어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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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는 삭발을 단식, 장외 투쟁과 함께 야당이 여당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꼽는다. 단식은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다'는 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지만 건강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로 함부로 감행하기가 쉽지 않다. 이에 비해 삭발은 단식보다 부담은 덜하면서 자신의 뜻을 '시각적'으로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투쟁 수단이다. 요구를 관철하고, 투쟁을 독려하며,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효과가 있다. 꼭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이목을 한번에 끌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주로 활용한다. 투쟁의 절박함을 국민에게 호소하는 차원도 있다.

삭발 투쟁 효과에 대한 비관론도 제기된다. 괜히 머리만 밀고 실리는 못 챙긴 채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과거에는 통했지만 지금 시대에 효과적인 투쟁 수단인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고, 자칫 국민에게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 9단'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박지원 대안정치연대 의원은 이언주 의원 삭발 이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삭발, 단식, 의원직 사퇴는 20세기 유물이다. 21세기 의원들은 구시대 투쟁 방법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며 "지금 시대는 삭발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 정치사에서 삭발 투쟁의 주인공들은 명암이 엇갈렸다.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의원이 있는 반면 머리카락만 자른 채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한 의원도 있다. 정치권 삭발의 '원조'는 박찬종 전 통일민주당 의원이다. 박 전 의원은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김영삼 두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며 삭발을 했다. 단일화는 실패했지만 박 전 의원의 결기는 큰 국민적 호응을 얻었고 이후 두 번의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내리 당선됐다. 이후 1997년 김성곤 전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며, 1998년에는 정호선 전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나주시장 공천헌금 의혹과 관련한 검찰 수사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삭발한 바 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주로 집단 삭발이 이뤄졌다. 2007년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요구하며 이군현·신상진·김충환 한나라당 의원이 함께 머리를 잘랐다. 결국 재개정안은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이 입장을 선회하며 국회에서 통과됐다. 2010년에는 이명박정부가 추진하던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며 이상민 자유선진당 의원 등 충청권 의원 6명이 집단 삭발을 했다. 당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여론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부정적이었는데 국회의원들의 집단 삭발 이후 국회에서 수정안이 부결됐다.

지역구 현안을 내세워 머리를 자른 사례도 있다. 2011년 장세환 민주당 의원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본사의 전북 이전을 촉구하며 삭발을 했다. 2013년에는 통합진보당 소속 의원 5명이 정부의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에 반발해 함께 머리를 밀었다. 이때 김재연·김미희 통합진보당 의원이 여성 국회의원으로는 처음 삭발을 감행했다. 이들은 삭발과 함께 집단 단식에도 돌입했지만 많은 국민의 공감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2014년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통합진보당은 해산됐다.

올해 들어서는 한국당이 삭발 투쟁을 활용하고 있다. 지난 4월 선거제·개혁법안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올려지자 무효를 주장하며 박대출·김태흠·성일종·이장우·윤영석 의원이 국회 본청 앞에서 삭발한 바 있다.

외국 언론들도 한국 정치인들의 삭발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영국 BBC방송은 "한국의 삭발은 유교에서 비롯된 오랜 전통"이라며 "특정 사안에 대해 자신의 결의를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보도했다. BBC방송은 사드 배치 반대, 이천시 주민들의 SK하이닉스 공장증설 반발 등을 사례로 들며 이같이 보도했다.

[고재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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