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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삼각김밥보다 폭신하고 따뜻한… 그 김밥,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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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누가 봐도 연애소설]

시작은 따뜻한 김밥처럼

조선일보

일러스트= 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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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는 나를 데리고 무작정 김밥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계산대 바로 옆 주방에서 당근을 썰고 있던 용성씨가 고개를 들었다. 용성씨는 나와 정우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금 작은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라고 말했다. 어서 오세요라니…. 지금 이 판국에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거란 말인가? 나는 괜스레 마음이 사나워졌다. 정우는 어쩐지 좀 거만한 목소리로 용성씨를 향해 말했다. 여기 참치 김밥 두 줄이요. 좀 빨리요. 용성씨는 흘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바라보곤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모든 게 엉망으로 꼬이기 시작한 것은 정우가 다시 나를 찾아오면서부터였다. 정우로 말하자면 나와 3년 동안 죽고 못 사는 관계로 연애했던 전(前) 애인이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에 있는 한 대기업의 인사부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는 일 년 전 헤어졌다. 그건 명백하게 정우의 잘못 때문이었다. 정우가 같은 회사 내 대학 선배들과 함께 3차로 노래방을 갔고, 거기에서 여성 도우미들과 술을 마셨다고 실토했는데, 나는 그것이 도무지 용납되지 않았다. 여성 도우미와 술을 마셨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정우의 태도와 표정이, '나야 뭐 어쩔 수 있나, 선배들이 그러자는 걸'이라고 말하는 정우의 목소리가 내게 더 큰 모욕으로 다가왔다. '진짜야, 난 그냥 취해서 술만 마셨다니까'라고 말하는 정우에게 나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말했다.

"너도 똑같은 개새끼야."

나는 그렇게 정우와 헤어졌다.

결별을 선언한 건 나였지만, 나는 그 후 꽤 심한 후유증을 겪어야만 했다. 왜 아니겠는가?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정우는 농담도 잘하고 매사 가벼운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심성이 여리고 따뜻한 면이 많은 남자였다. 어린 시절 일찍 암으로 아버지를 여의었고 그 때문에 여러 친척 집을 전전한 상처도 가지고 있었다. 정우가 종종 실없는 농담을 자주 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정우의 상처를 더 많이 보려고 노력했다. 그랬던 사람과 헤어지고 나니…. 나는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 달 넘게 자취방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고향인 강원도 문막으로 내려왔다. 다니고 있던 대학원엔 자퇴서를 제출했다.

문막으로 내려온 후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했다. 아버지가 노후 생계용으로 아파트 단지 내 상가 일 층에 문을 연 편의점은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알바를 쓸 사정도 되지 않아서 두 분이 돌아가면서 계산대를 봤는데, 딸 덕분에 한숨 돌린다고 툭툭 내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부모님은 내게 왜 대학원을 그만두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이 그런 식으로 나를 위로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편의점에 앉아서 나는 줄곧 정우 생각을 했다. 다시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몇 번인가 휴대폰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그가 다시 나를 찾아온다면 못 이기는 척 따라갈 마음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편의점 창고를 정리했고 얼마 빠지지도 않은 물건을 다시 진열했다.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할 삼각김밥을 꾸역꾸역 먹기도 했다. 그런 내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는지 편의점 바로 옆 '용김밥'의 용성씨가 포일로 감싼 김밥을 갖다주었다.

"삼각김밥보다 그래도 이게…."

용성씨는 문막 토박이로 이십 대 땐 주로 배달과 택배 일을 했고, 그때 모은 돈으로 김밥집을 차린 35세의 총각이었다. 키는 170센티미터가 안 되어 보였고, 선명한 M자형 이마를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누구보다 일찍 김밥집 문을 여는, 보기 드물게 성실하고 손이 빠른 남자라고 했다. 나는 용성씨가 건넨 김밥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무심코 하나 입에 넣어보았다. 김밥은 삼각김밥보다 폭신했고… 또 무엇보다 따뜻했다. 입맛이 없었는데도 나는 계속 용성씨의 김밥에 손이 갔다. 하나, 하나… 어쩌면 그게 용성씨와 나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심코 손이 가는 따뜻함.

그렇다고 용성씨와 내가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와 몇 번 아파트 단지 주변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갔고, 커피도 마셨지만… 나는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용성씨와 함께 있으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았고 또 마음도 편했지만, 그 편안함이 나는 의심스러웠다. 무언가 내가 도망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잊으려고 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은 아닐까… 나는 나 자신을 믿지 못했다. 그런 나를 용성씨는 아무 말 없이 지켜봐 주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 정우가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너를 잊지 못하겠다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제 알았다고, 사실은 벌써 여러 번 편의점 앞까지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갔다고, 정우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말에 흔들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냥 이쯤에서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다고, 용서해주자고, 매일 밤 마음을 고쳐먹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용성씨는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포일로 감싼 김밥을 가져다주었고….

그러니까 정우가 나를 데리고 '용김밥'으로 들어간 것은 어쩌면 다분히 의도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몰래 편의점 앞으로 자주 찾아왔다면 나와 용성씨가 산책하는 모습 또한 종종 봤을 테니까. 나는 그런 정우보다도 아무 말 없이 주문만 받는 용성씨가 더 원망스러웠다.

"점심은 김밥으로 때우고 저녁은 이따 원주 가서 먹자. 내가 거기 와인바 예약해놨어."

정우는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런 정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계속 또각또각 당근만 써는 용성씨의 뒷모습도 바라보았다. 나는 젓가락을 들고 김밥을 하나 들어 올렸다. 나는 정우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꺼져, 새끼야."

정우가 김밥을 먹다 말고 멀뚱멀뚱 나를 바라봤다.

"안 들려? 꺼지라고."

나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또각거리던 용성씨의 칼질이 멈췄다.

[이기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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