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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송혜진의 영화를 맛보다] 매워서 울고 슬퍼서 울고 설움 대신 닭발을 뜯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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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 홍당무

조선일보

친한 후배가 밤 12시쯤 "와인을 찾아 편의점을 헤매고 있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왔을 때 직감했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었구나.' 그 고민을 내가 덜어줄 순 없겠지만, 알아줄 순 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일단 오늘을 무사히 넘겨 봐.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라고 답장하는데 괜히 내 코끝이 시큰했다. 우리는 오늘도 겨우 버틴 것이다.

먹으면 망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먹고 말 때가 있다. 내 경우엔 떡볶이가 그렇다. 열심히 해온 일에 누군가 슬쩍 숟가락 얹어 자기 것처럼 포장하는 걸 봤을 때, 오랫동안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때, 그때도 난 떡볶이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늦은 밤까지 남편과 함께 그걸 먹으며 울기도 했던가. 매워서 울고, 화나서 울고, 이런 것에 아직도 마음 끓이는 스스로가 부끄러워 울었던가. 글쎄, 기억나는 건 그저 다음 날 얼굴이 호빵처럼 부어올랐다는 것, 그렇게 보낸 밤 덕분에 그래도 또 많은 것을 잊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모호필름


영화 '미쓰 홍당무'(감독 이경미)의 주인공 양미숙(공효진)에겐 매운 닭발이 그런 음식이다. 안면홍조증이 심각해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미숙에게 세상은 야속하기만 하다. 고등학교 러시아어 선생님이지만 같은 학교 동료 선생님(황우슬혜)에게 러시아어 수업을 뺏기면서 팔자에도 없는 영어 수업을 맡게 된 데다, 10년 동안 짝사랑했던 남자(이종혁)마저 그 동료와 '썸'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미숙은 앞뒤 잴 것 없이 매운 닭발집으로 향한다. 비닐 장갑을 끼고 시뻘건 닭발을 뜯는다〈사진〉. 너무 매워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까지. 머릿속 분노와 서러움이 모조리 캡사이신 맛에 증발될 때까지. 먹을수록 얼굴은 더 붉어지지만, 미숙은 선글라스를 끼고 계속 닭발을 씹는다. 먹은 덕에 일어설 수 있고, 먹은 덕에 다시 또 '삽질'을 시작할 수 있다. 미숙도 어쩌면 다 먹고 나서 거울을 보며 '망했다'고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그래도 결국 피식 웃지 않았을까.

그래, 가끔은 닭발로, 떡볶이로 넘겨야 하는 날도 있다. 그리고 먹고 나면 알게 된다. 다 괜찮아졌다는 걸.

[송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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