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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세상읽기] 1997년 베이징, 2019년 홍콩 / 조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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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1997년 7월1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날에 나는 베이징에 있었다. 함께 어학연수를 하던 기업 주재원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해야 한다며 시내 중심의 스카이라운지를 일찌감치 예약해 둔 터였다. 천안문을 좌우로 가로지르는 창안제(長安街·장안가)는 지금은 정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봉쇄되고 평소에도 검문이 잦지만, 그날 밤은 베이징 시민들에게 온전히 자리를 내주었다. 오성홍기를 손에 들고 천안문을 향해 뛰어가던 시민들의 행렬은 장관이었다. 밤하늘을 뒤덮은 불꽃과 함성, 북받친 감정이 뒤섞인 그날 창안제의 풍경은 오래도록 내 마음을 훔쳤다. 자신을 세상의 중심(華)에 두었던 나라가 서양 오랑캐(夷)에게 처참히 패배하고 불평등 조약을 맺었던 게 1842년의 일이다. 많은 중국인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사회주의 혁명보다 분열된 나라를 통일한 역사로 기념한다. 이들에게 홍콩 반환이란 굴욕적인 근대사에 종지부를 찍고 중화(中華)의 귀환을 선언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천안문에 모였던 베이징 시민들은 2019년 홍콩의 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호기롭게 내달렸던 창안제는 건국 70주년 열병식 행사를 한다고 시민들의 걸음을 막았다. 비가 퍼붓는 가운데 영국과 중국의 국기교대식이 거행되던 그날이나, 최루탄 먼지가 도심에 자욱한 지금이나 관영방송의 짤막한 화면만으로 홍콩의 마음을 읽긴 어렵다. 하긴 베이징에서 2천㎞나 떨어진 곳이다. 비행기를 타도 족히 4시간이 걸린다.

그렇다고 20여년의 시간 동안 마주침이 없었을 리 없다. 특히 고속철과 지하철(MTR)로 일일생활권이 된 중국 남부에서 ‘홍콩’은 육화된 정동(情動)으로 다양한 교접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개혁개방 이후 전례 없는 불평등이 경제발전의 토대마저 위협했을 때, 중국 정부는 사회주의 국가에 사회문제란 있을 수 없다는 자기최면을 걷어내고 사회복지(사회공작)에 눈을 돌렸다. 식민의 유령을 소환하는 구미의 나라들 대신 홍콩의 사회복지사와 연구자 집단을 초청하여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고 교류를 넓혀왔다.

홍콩에 기반을 둔 글로벌 엔지오나 홍콩의 노동운동 조직은 중국노동운동사에 거대한 자취를 남겼다. <전태일 평전>도, 삼성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홍콩을 경유해 대륙의 노동운동가들에게 전해졌다. 이들의 활동에 중국 정부가 언제나 적대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과 달리 국가 조직인 중국의 노동조합(공회)은 때때로 홍콩과 연결된 비합법적인 엔지오로부터 기층 노조를 운영하기 위한 혜안을 얻기도 했다. 2010년 애플의 하청업체 폭스콘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연달아 목숨을 끊었을 때, 베이징과 대만, 홍콩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연구팀을 조직한 일도 있다. 대만계 기업의 폭력을 고발하고 생존자들을 보살핀 이들의 범중화권 연대는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새로운 상상과 실험 역시 홍콩과의 교류에 빚지고 있다. 광둥성에서 내가 만난 젊은 창업가들 대부분은 홍콩을 통해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대안적 시장의 실례를 접했다. 홍콩과 선전(심천)의 청년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지혜를 맞댄 덕택에 윤리적 책무와 창의적 아이디어를 결합한 사회혁신 스타트업이 탄생하기도 했다.

도시연구자인 앤디 메리필드는 “지속하는 마주침이 일어나면 그 어떤 것도 예전과 동일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생성의 과정 속으로, 뭔가 다른 것이 되어가는 과정 속으로 쏘아 보낸다”고 말한다. 중국과 홍콩의 마주침이 그동안 반목과 냉소로 점철된 것만은 아니다. 새로운 제도를 실험하고, 민주를 고민하고, 혁신을 도모하는 생성의 과정은 홍콩이 중국과 가까웠기에, 그럼에도 문턱 너머 바깥에 한발을 디뎠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지난 우산혁명 이후, 그리고 다섯달째 계속되는 최근의 시위를 거치면서 중국을 풍요롭게 했던 마주침의 순간들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중국의 지방정부는 홍콩 사회복지사들과의 접촉을 기피하고, 노동운동은 극심한 탄압에 좌초되고, “선전시 홍콩구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오만한 농담이 선전과 홍콩 청년들의 발랄한 교류를 압도하고 있다. “중화의 귀환”이란 홍콩이 바깥에 걸쳤던 한발을 기어이 안으로 들여와야만 완성되는 과업일까? 오랫동안 내 값진 추억이라 여겼던 1997년 여름 베이징의 풍광이 갑자기 섬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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