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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이슈 난민과 국제사회

[가수 호란 기고]태국 맬라 난민촌에서 만난 희망, 그곳에 인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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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나라에 재정착한 카렌족 난민을 위한 토크콘서트에서 공연을 해줄 수 있겠냐는 유엔난민기구의 문의 전화였다. 당시 나는 음주운전 사고를 일으킨 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집에 틀어박힌 상태였다. 인간은 모두에게 잊힌 후 진정으로 죽는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였다. 물리적으로도 아마 반쯤은 죽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받은 그 한 통의 전화는 나에게 노래가 아닌 삶을 의뢰하는 것처럼 들렸다. 카렌족이 누구인지, 재정착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나는 무조건 참석을 약속했다. 그것이 카렌 난민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공연을 위해 준비한 곡 중 난민촌에서 생활하며 작곡활동을 하고 있는 카렌 난민 뮤지션의 곡도 있었다. ‘We Need Peace’라는 곡은 전쟁으로 아이들이 죽어가고 소녀들이 울고 있지만 카렌인들은 여전히 평화를 꿈꾼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토크콘서트에 참석한 카렌 난민에게서 유튜브 링크를 전달받아 노래를 반복재생하고 한글로 발음을 받아 적어가며 곡을 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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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호란(오른쪽)이 2017년 11월3일 서울 을지로 롯데에비뉴얼에서 열린 카렌족 난민 토크 콘서트에서 카렌족 노래 ‘We Need Peace’를 부르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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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당일, 우리와 많이 닮은 얼굴의 그들은 모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객석 한쪽에 모여 앉은 난민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함께 흘린 눈물로 가늘게나마 그들과 잠시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어리석은 잘못으로 사람들에게서 버려진 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려주는 그들이 고마웠고, 내가 아직 누군가에게는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거기까지였다. 이 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날 불렀던 노래가 잊히지 않아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난민 뮤지션의 곡을 들여와 저작권을 등록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내 포기했다. 인터넷을 통해 해당 곡의 원곡자를 찾아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지만 곧 그와도 연락이 끊겼다. 나와 카렌 난민들의 인연은 거기에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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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호란이 당시 공연 전 연습을 위해 ‘We Need Peace’ 노랫말을 들리는 대로 한국어 발음으로 풀어 쓴 가사와 코드 진행 순서를 간단히 적은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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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유엔난민기구의 행사에서 몇 번의 공연을 했지만 나는 여전히 난민에 대해 제한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고, 때문에 난민 문제에 대해 특별한 태도나 의견을 가질 깜냥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기구의 ‘태국의 난민촌을 방문해 카렌 난민을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때문에 불시에 뒤통수를 맞는 것처럼 놀라웠다. 공연을 통해 도움을 주는 것과 현지에서 난민을 만나는 것은 너무도 다른 일로 느껴졌다.

아직은 그렇게 깊이 발을 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솔직히 말하고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 거절도 승낙도 아닌 채로 시간을 끌었던 것은 나의 얄팍하고 이기적인 속내를 들킬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내가 시간을 끌면 제안한 쪽에서 알아서 포기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가끔 한 번씩 내게 난민촌과 난민들의 현실에 대한 자료를 보내오는 유엔난민기구 공보관의 메시지를 받으며 생각이 점차 변해갔다. 가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세상에서 지워진 이름으로 살아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데 어째서 계속 도망을 치나. 여전히 나의 쓸모를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도망친다면, 나는 어쩌면 앞으로 평생 이 선택을 후회하며 살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이기적인 동기로 나는 태국행 항공권을 끊었다.

매솟(Mae Sot)은 태국의 서북부, 미얀마와 맞닿아있는 국경도시다. 미얀마 출신 난민들이 살고 있는 난민촌이 몇 개 모여 있는 이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맬라 난민촌(Mae La Camp)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그곳이었다. 2년 전 노래를 통해 잠시 교감했던 난민들이 우리나라에 재정착하기 전 살았던 곳이라고 했다.

출발 전 자료를 읽어보고 동영상도 찾아보았지만 막연히 다른 세상으로 여기던 난민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받아든 자료 속 숫자들은 추상적으로 흩어졌고, 뉴스와 글로 찾아본 카렌 난민들의 얼굴은 모두 비슷해 보였다. 오롯이 자신들만을 위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난민들에게 흔치 않은 경험이라며 몇 곡 연주하면 어떻겠냐는 공보관의 제안에 스무 곡 정도의 우쿨렐레 레퍼토리를 구상했다. 하지만 연습을 하는 중에도 내가 무엇을 보고 듣게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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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난민기구 태국 매솟 사무소에 도착한 호란. 유엔난민기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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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5일 이른 새벽 비행기에 탑승해 여섯 시간을 날아 방콕에 도착했다. 다섯 시간쯤 대기한 후 태국 국내선을 통해 매솟 공항에 내려 숙소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국도로 한 시간 가량 이동해 마침내 맬라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큰 착각에 빠져있었는지 깨달았다.

경이로웠다. 그곳은 딴 세상도, 아수라장도 아니었으며, 영화의 세트장 같지도 않았다. 그곳은 어려움을 딛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형성한 작은 국가였다. 그곳에 있는 것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단단히 꽃피어 있는 삶의 의지였다.

잊고 있었다. 인간은 무기력하게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짐승이 아니다. 죽음으로부터 피신한 이들은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흙먼지 날리는 땅 위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며 아이를 낳고 교육하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공부하고, 아픈 자들은 치료를 받고, 부모는 새로이 태어나는 생명의 출생을 신고하며 난민들 한명 한명은 각자 언제 현실이 될지 모르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태국에 도착한 카렌 난민들은 어쩌면 그나마 운이 좋은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태국은 1951년 유엔난민협약의 가입국이 아니며 따라서 엄밀히 말해 난민을 보호할 국제적인 책무가 없다. 그럼에도 태국은 2008년부터 난민을 포함하여 자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법적으로 허가하고 있으며 이는 난민 아이들이 무국적자가 되는 것을 예방할 뿐 아니라, 이후 귀환하거나 재정착할 때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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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서 피신한 카렌족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태국 매솟의 맬라 난민촌 전경.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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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매솟 맬라 난민촌 내부. 구글스트리트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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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매솟 맬라 난민촌 내부. 구글스트리트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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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지난 해 내전을 피해 간신히 도망친 500명 정도의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논란을 알고 있는 나는 맬라 캠프를 담당하는 태국 내무부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들의 의무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난민을 보호할 수 있습니까?” 그의 대답은 당연하다는 듯 간단했다. “인간에 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태국 정부는 국가인력을 투입해 난민을 보호하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맬라 캠프에만 3만5000명의 난민이 살고 있으며 매솟 지역의 난민 규모는 5만7000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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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매솟의 맬라 난민촌에서 살아가는 카렌 난민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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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을 발생시키는 비극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국 정부에게 있어 난민 문제는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넘어오는 난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면서 그만큼 옆집 사람들의 이야기로 느껴진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층간소음만 가지고도 살인이 일어난다. 하지만 성가시기 짝이 없는 위층 아이의 뛰는 소리도, 그 아이의 얼굴을 알게 되면 다르게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태국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나라에 몸을 의탁한 난민들이 두렵고 이질적인 존재가 아닌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나의 고정관념이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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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태국 매솟의 쓰레기처리장 위에 지은 움막에 한 카렌족 남성이 아픈 표정으로 누워 있고, 아이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쓰레기산에 사는 미얀마인들은 난민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이들이다. 이들은 쓰레기더미에서 쓸만한 물건들로 생활해나간다.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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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난민기구와 태국 현지의 난민지원 단체인 ‘가톨릭난민긴급구호’(COERR)가 함께 교육을 지원하고 있는 청소년 센터에서 카렌 난민 청소년들을 만났다. 널빤지와 건초 등으로 허름하지만 야무지게 지어올린 센터 안에 들어가니 아이들 50~60명 정도가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어색하게 우쿨렐레를 매고 언제쯤이 내가 노래할 타이밍인지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아이들이 긴장한 얼굴로 일어났고 동기동기 통기타 한 대가 울리기 시작했다. 고운 노래가 이어졌다.

“웃음은 행복한 것 / 웃음은 행복한 것 / 어려울 때에도 좋을 때에도 / 우리는 웃음지어요”라는 내용의 카렌 노래를 환영가로 내게 불러준 아이들은 그 곡을 한국어로 바꾸어 자신들에게 불러줄 수 있냐고 물었다. 부랴부랴 계이름을 받아 적고 가사를 한국어로 바꾸어 노래를 돌려줬다. 그렇게 몇 곡의 노래를 교환하다 한국에 대해 아느냐고 묻자 한 소녀가 “이민호!”하고 크게 외쳤다. 모두 함께 물보라처럼 까르르 웃었다. 아이들은 카렌어로 조잘조잘 말을 걸어왔고 카렌어는 태국어로, 다시 영어로 통역되어 내게 전해졌다. 아무도 조급해하지도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나를 만난 것은 난민이 아닌 카렌 소년소녀들이었다.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다는 청소년 센터의 유일한 ‘기타리스트’에게 가져간 우쿨렐레를 선물했다. 그 악기가 훗날 어떻게 사용될지를 생각하자 마음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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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란이 맬라 난민촌에 사는 카렌 아이들에게 들려줄 노래를 연습할 때 쓰려고 그려놓은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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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방문한 귀환훈련센터 (Voluntary Repatriation Centre)에서는 모의재판이 한창이었다. 스무 명쯤 되는 성인들이 모여 그들의 언어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웃음기 없는 얼굴에 실제로 무슨 문제가 발생한 건가 착각할 정도였지만, 사실은 신원등록을 위한 절차를 연습하는 것이라 했다. 아직은 다가오지 않은 미래지만 귀환을 했을 때 미얀마에서의 법적 신분 취득을 위해 그곳의 법정에서 받을 수 있는 질문들에 대비하기 위해 모의재판은 시종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재미삼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필요는 없었다. 지적인 눈빛과 목소리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 이 곳에서 훈련을 마친 사람들은 각자 캠프 내 자신의 구역 다른 난민들에게 이날 훈련한 것을 다시 알려주게 된다고 했다.

나는 우습게 봤던 것이다. 하루하루 슬픔에 잠겨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맬라 캠프 안에서 발견한 것은 인간의 강인함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도 사람들은 다시 집을 지었고,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노래를 가르쳤으며, 누군가의 시혜를 기대하며 손을 벌리는 대신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 지식을 쌓으며 훈련을 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들에 매몰되는 대신, 새로이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십대의 남자아이는 음정이 맞지도 않는 기타를 독학하여 모르는 노래에 즉석에서 반주를 할 만큼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막힘없는 문장으로 자신을 변호하던 모의재판 면접자의 숨길 수 없는 지성은 그의 눈빛으로 흘러나왔다. 수줍은 몸짓으로 자신이 만든 종이꽃을 보여주던 소녀의 얼굴은 그 어떤 고통도 꺾지 못한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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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란이 태국 방콕에 있는 난민센터에서 도시 거주 난민 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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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태국 매솟의 쓰레기처리장에서 한 카렌족 아이가 종이 돗자리 위에 앉아 엄마를 쳐다보고 있다. |장준희 다큐멘터리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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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의외로 살만 하더라,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잘 살아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척박한 곳에서도 난민들은, 아니 인간들은 그토록 강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더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게 된 난민들에게 가장 희망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식상한 질문을 했고, 그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자신의 힘으로 정당하게 일하여 그 대가로 가족들을 부양하며 안전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빛나는 지성, 빛나는 재능, 빛나는 아름다움과 그 모든 걸 뛰어넘는 강인함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개개인의 아름다움은 난민이라는 두 글자에 매몰되어 나와 같은 무지한 인간들에게 타자화 된 채로 받아들여진다. 피상적인 집단으로서의 난민을 바라볼 때 난민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수월해진다.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찬성하거나 혹은 반대하거나. 그러나 함께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고 노래를 교환하고 악수를 나눈 뒤에 남는 것은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당연한 깨달음이었다. 동시에, 그 아름다운 개개인의 삶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 또한 아프게 찾아왔다.

헤어질 시간이 되어 원하는 사람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슬퍼하며, 분노하며, 애통해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던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며 환하게 웃었다. 렌즈에 가장 예쁘게 담기기 위해 자신 있는 표정을 짓고 포즈를 잡고 마음에 안 들면 사진을 다시 찍으며 우리는 깔깔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앞에서 마냥 함께 깔깔대고만 있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대체 이 사람들에게 어떤 작별인사를 해야 할지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싸안고 울기라도 하고 싶지만 그 또한 배부른 자의 감정놀음일 터였다. 나는 여기 잠시 다녀가는 사람이고,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안전한 삶 속으로 복귀할 인간이라는 걸 그들도 나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삶 앞에서 나의 슬픔은 초라했으며 나는 너무도 무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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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카렌족 난민 토크 콘서트 공연 당시 무대 뒤편 스크린에 한국 재정착 카렌 난민 가족 아이 보라의 웃는 모습이 보인다. 유엔난민기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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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와 글을 쓰고 있는 내게 생생하고 고운 눈빛의 여성이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돌아가서 우리의 얘기를 전해달라고. 그녀에게 나는 그러겠다고, 꼭 그러겠다고 몇 번이고 대답할 것이다. 난민촌에서 만난 카렌인들이 내게 부여한 사명으로 이 글을 쓴다. 그들이 내게 나눠 준 이야기가 또 어딘가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작은 깨달음을 전하고자 한다. 어디에서 태어났든, 어디에 살고 있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갈 권리가 있으며 미래를 꿈꿀 권리가 있다. 내가 방문한 난민촌. 그곳에는 인간이 있었다.

가수 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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