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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동백꽃 필 무렵’, 차별과 편견이 만든 ‘팔자 센 여자’에 대한 항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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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주인공 동백(공효진)과 향미(손담비)의 어린시절 일화는 차별과 편견이 한 사람 인생에 어떻게 작동하고, 또 다른 편견을 생산하는지를 보여준다. 소풍 가던 날, 도시락 싸줄 사람이 없어 천원짜리 포장 김밥을 먹는 동백이와 향미를 어른들은 ‘마리아’와 ‘물망초’라고 부른다. K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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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슥한 공단 뒷골목, 창문이 없는 술집에서 자란 남매가 있다. 훗날 누나는 성매매 여성이 됐고, 남동생은 유학생이 됐다. 하나는 팔자가 박복해서, 또 하나는 팔자가 좋아서일까.

“니가 쪽팔려하는 그 일, 내가 그 더러운 일 해서 니가 그 고귀한 유학생이 된 거야. 이 시궁창에서 내가 깨금발 들고 너 하나 머리 위로 아득바득 들쳐 올리고 있던 거라고.” 돈이 필요할 때마다 누나를 찾던 동생은 누나가 자신이 있는 덴마크로 오려하자, ‘교민사회가 좁다’며 만류한다. 끝까지, ‘억세게 운 없던’ 누나는 얼마 뒤 저수지 한가운데서 죽은 채 발견된다. 범인으로는 주로 ‘직업 여성’을 노린다는 연쇄 살인범이 지목된다. KBS 2TV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등장한 향미(손담비)의 인생은 이렇게 몇 줄의 문장으로 정리된다.

<동백꽃 필 무렵>에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팔자’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미혼모, 과부, 성매매 여성 등 가부장적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여성 뒤에는 ‘팔자 사납다’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팔자는 사람이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간을 간지(干支)로 나타낸 여덟 글자로, 일생의 운명이 이 안에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팔자 세다’는 낙인이 찍힌 여성들의 생애사를 촘촘히 엮은 <동백꽃 필 무렵>을 보고 있자면, 이 팔자라는 게 결국 사회적 약자를 향한 차별과 편견이 예견한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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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필 무렵>에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팔자’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미혼모, 과부, 성매매 여성 등 가부장적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여성 뒤에는 ‘팔자 사납다’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K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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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주인공 동백(공효진)과 향미의 어린시절 일화는 차별과 편견이 한 사람 인생에 어떻게 작동하고, 또 다른 편견을 생산하는지를 보여준다. 소풍 가던 날, 도시락 싸줄 사람이 없어 1000원짜리 포장 김밥을 먹는 동백이와 향미를 어른들은 ‘마리아’와 ‘물망초’라고 부른다. “쟤네들이랑 친해지면 골치만 아파. 한 반에 마리아랑 물망초가 다 있을 게 뭐냐고.”, “마리아는 엔젤 마리아원, 고아. 물망초는 거기 공단 뒷골목 창문 없는 술집. 거기 딸이잖아. 알지? 저런 애들이 더 독하고 영악한 거.”

어른들 말에 아이들 마음에도 차별의 싹이 자란다. 물건이 사라지자 같은 반 아이들은 가장 먼저 동백과 향미를 의심한다. 선생님도 다르지 않다. “우리반 결손 가정 둘 알지? 그런 애들 특유의 음침한 거. 하나는 소 죽은 귀신 씐 애처럼 음침하고, 하나는 싹수가 노랗지 뭐.” ‘소 죽은 귀신 씐 애처럼 음침’하다는 동백이는 자꾸만 움츠러들어 토끼장에서 눈물을 훔치고, ‘싹수가 노랗고, 영악’하다는 향미는 아이들 머리채를 잡으며 더 어깃장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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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무당은 젊은 덕순(우정원)을 향해 ‘장수(長壽) 팔자’가 과부살을 못 이긴 탓이라고 말한다. K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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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팔자소관’이란 말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무당은 젊은 덕순(우정원)을 향해 ‘장수(長壽) 팔자’가 과부살을 못 이긴 탓이라고 말한다. 남편상을 치른 덕순이 식당 문을 열자 “저렇게 독하니까 남편을 잡지. 과부 팔자가 괜히 있어?”란 흉이 쏟아진다. 가시 돋힌 말은 세월이 거듭되도 마찬가지다. 미혼모 동백이 술집을 열자 “애당초 미혼모가 무슨 술집” 등 ‘박복한 여자’라는 말과 함께 혐오적 발언이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

공간적 배경이 된 가상도시 ‘옹산’이 특별히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으로 가득찬 곳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다. 게장골목이 형성된 옹산은 여성들이 경제활동 주체이자 가장 역할을 하는 모계사회에 가깝다. 그럼에도 차별과 편견이 덕순과 동백을 거쳐 재생산되는 것은, 팔자란 꼬리표에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던 여성들의 자기검열의 결과에 가깝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보아온 대로 나이테가 생긴다”는 동백의 독백처럼, ‘팔자 드세다’는 소리를 인이 박이게 들어온 이들이기에 팔자 앞에서 겁쟁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덕순과 동백이 터를 잡는 곳도, 이들을 품어주는 곳도 ‘팔자 드센’ 여자들이 모여 사는 이 옹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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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산에서 다시 만난 동백과 향미는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 주며 팔자에 맞선다. 두 인물은 끊임없이 주변 인물들과 부딪히고 마주치며 공동체에 파동을 일으킨다. K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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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가 아무리 진상을 떨어봐라 내가 주저앉나.” 옹산에서 다시 만난 동백과 향미는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 주며 팔자에 맞선다. 가끔은 “내 팔자가 그렇지”하며 팔자를 현실도피의 변명으로 쓰기도 하지만, 두 인물은 끊임없이 주변 인물들과 부딪히고 마주치며 공동체에 파동을 일으킨다. 팔자소관대로 ‘가만히’ 살지 않겠다는 두 여성의 연대는 향미의 죽음을 마주한 동백의 “이젠 도망가지 않는다”는 말로 완결된다.

“더러운 물에서 연꽃이 피었다고 연꽃만 칭찬하지만 연꽃을 피울 만큼 내가 더럽지 않다는 걸 왜 몰라. 내가 연꽃이 사는 집이라는 걸 왜 몰라.” 지난달 14일 세상을 떠난 가수 겸 배우 설리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했던 이장근 시인의 시 ‘왜 몰라’ 내용처럼, <동백꽃 필 무렵>의 주인공들은 말한다. 숱한 차별과 편견을 견디며 살아온, 저수지 밑바닥에 엎드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숨통을 틔워온 우리를 이제는 있는 그대로 바라봐 달라고.

지난 9월18일 첫방송한 <동백꽃 필 무렵>은 <백희가 돌아왔다>, <쌈, 마이웨이>의 임상춘 작가와 <함부로 애틋하게>, <너도 인간이니>의 차영훈 감독이 <백희가 돌아왔다> 이후 3년여 만에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연일 최고 시청률을 경신해 20%를 목전에 둔 드라마는 오는 21일 종영한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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