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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공감세상] 술과 담배로부터의 자유 / 주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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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주승현ㅣ인천대 통일통합연구원 교수

“남자라면 술과 담배 둘 중 하나라도 해야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다.” 북쪽에서도 들었던 얘기를 남쪽에 와서도 똑같이 들었다. 개인의 취향이나 자율적 선택과 무관하게, 조직생활에 잘 적응하고 사회활동에 필요한 인맥을 쌓기 위해서는 술과 담배가 여전히 적잖은 역할을 한다는 말로 들렸다.

나는 어릴 적 그 사건을 겪지 않았다면 아마 담배를 배웠을 것이다. 친구들과 옥수수 건초 더미에서 놀다가 부지불식간에 모두 태워버린 적이 있다. 그 건초 더미는 인근 농장에 있는 소들이 먹어야 할 일 년치 사료였다. 한 친구의 주머니에서 성냥갑과 함께 담뱃갑도 발견됐다. 호된 추궁을 받았는데 흡연자로 몰린 것이 너무 억울해서, 어른이 되어서도 담배만큼은 배우지 않겠다고 그때 결심했다.

군 복무를 비무장지대(DMZ)에서 했는데 그곳만이 특별히 여과담배(필터담배)가 공급됐다. 한 달에 15갑을 지급했는데,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얘기했다가 선임들의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에 말을 바꾸어서 담배를 받았다. 군인 월급이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그 필터담배 한 갑이 장마당에서 당시 사병 월급의 세 배 정도였으니 선임들이 놀랄 만도 했다. 그때 ‘입담배’라는 것을 처음 배웠다. 입담배는 담배 연기를 삼키지 않고 입으로만 내뿜는, 사실상 담배 피우는 시늉이다. 담배로 인해 훈련소에서는 동기들에게, 후임병 시절에는 선임들에게 관심을 얻었다.

술에 관해서 만큼은 북한도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숨 막히는 통제 사회라고만 믿는 이들은 북한의 술 문화를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청년조직과 소조(동아리)를 맡은 청년 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건네주는 술잔으로 처음 술자리에 입문했다. 아버지는 귀한 술과 담배가 들어 있는 서랍장의 열쇠를 가끔 두고 출근하셨는데, 필요할 때만 적당히 가져다 쓰라는 심중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입담배’와 술 문화 경험이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북한에서처럼 술과 담배를 못하는 사람이 ‘불편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문화를 일찌감치 눈치챘다. 대학을 다닐 때도 그랬고 졸업 뒤 회사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북쪽 출신이라는 빈한한 배경의 무연고 청년이 친구를 사귀고 조직 문화에 적응하는 데 술·담배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다가왔다.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면 부지런히 ‘입담배’를 함께 뿜었고, 학과 엠티나 동아리 술자리에서도 웬만하면 분위기를 맞추었다. 어쩌면 젊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담배는 외려 피는 사람들이 홀대받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나도 ‘입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됐지만, 술에 대한 인식과 환경의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회사생활을 할 때는 접대가 많은 관리팀에서 근무했다. 술자리에서 북한 출신자의 북쪽 얘기만한 안줏거리도 없었고 즐거워하는 고객들을 보며 상사도 덩달아 좋아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던 술자리를 정리하고 귀가하던 어느 새벽, 문득 술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대가 되면 반드시 술을 끊겠다는 결심에 이르렀다. 그때 들었던 걱정은 의지에 대한 나약함보다 서른이 넘어서도 술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회사생활을 계속했다면 어려움에 봉착했겠지만, 다행히도 지금 있는 학교라는 환경은 강제성이 덜해 결심을 지킬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친구들 모임이나 새로운 인맥을 쌓으려고 생각하면 불편한 점이 있지만, 무알코올 음료를 홀짝대며 킬킬거릴 만큼의 자유에 만족하며 산다.

술과 담배에서 무조건 벗어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회생활에서의 필수품 대신 취향으로의 본래 의미만 찾으면 좋겠다. 강한 자극과 공포에 호소하는 캠페인에 앞서, 낙인과 차별로 이어지는 사회적 인식의 부작용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한때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는 사람을 영웅호걸로 치켜세우던 북쪽에는 요즘 맥주가 유행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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